올해 호암미술관과 국제갤러리 전시에서 동시에 조명된 루이스 부르주아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여성 작가이다. 조각과 설치를 중심으로 성, 가족, 무의식, 트라우마를 탐구해 왔으며, 텍스트 작업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호암미술관 전시는 그녀의 정신세계가 형상화되어 관객 앞에 나타났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실제로 그녀는 정신분석을 오랜 기간 받으며 본인의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를 지속했으며 어렸을 적 트라우마를 예술로 치유해 낸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한다. 가정교사와 내연관계를 유지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모든 것을 인내했지만 우울했던 어머니의 모습은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지게 했으며 이러한 가정환경은 평생 그녀의 예술의 원천이 되었다.
”오이디푸스기의 나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라는 그녀의 고백은 어머니가 양육자이자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질투와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고 아버지는 성적 자아를 위협하는 인물로 자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 영상에서 그녀는 오렌지 껍질을 벗겨 사람을 조각하며 아버지가 던진 성적 농담에 충격받고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미 백발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섬세하고 예민한 예술가였다.
승화: 파괴를 창조로 바꾸는 힘
호암미술관 전시에서 그녀의 내면을 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낸 텍스트 결합 회화 작업을 볼 수 있었는데 ‘승화’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추상적 드로잉과 짧은 이야기가 나란히 실려 있다. 어린 소년이 부모가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일어나는 내면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
“아이의 시선에 비친 것.
열두 살이나 열네 살쯤 된 아이는 학교 방학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표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말했듯, 공포에 질린 표정, 혼돈을 깨달았을 때의 그 공포
그리고 부모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움을 계속했다.
끔찍하고 끔찍하고 또 끔찍했다.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 싸움은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부모의 싸움이라는 것. 그들은 싸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물론 아이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몸의 통제를 놓지 않았다.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옷장으로 가서 빗자루를 가져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다.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이야기 속 소년은 부모의 폭력적인 싸움을 목격하며 상처받고 무너지는 대신 벽장에서 빗자루를 꺼내
바닥을 쓸며 격렬한 감정을 상징적인 행동으로 전환한다. 이것이 바로 승화이다.
‘승화’라는 개념은 정신분석에 말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로 본능적 욕구나 참아내기 어려운 충동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형태로 돌려쓰는 것이다. 자아의 억압 없이 충동 에너지를 그대로 사용하되 가치 있고 생산적인 활동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건강한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속 소년에게는 빗자루질이 승화가 되었고 루이스 부르주아에게는 예술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혼돈은 언제나 창작으로 이어졌는데 책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혼돈이 나를 덮쳐올 때가 여전히 있다. 그 순간 나는 상징적 행위를 택한다.
내 경우 그것은 조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역사와 한계
1900년대 초반에 정립되기 시작한 정신분석 이론은 1920년대 유행한 미술사조인 초현실주의의 중심사상이 되기도 했고 임상현장에서 뿐 아니라 문화와 지식층을 전반적으로 지배했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정신분석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로 무려 33년간 이어졌다.
1970-90년대를 거쳐오면서 정신분석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정신분석 치료에 적합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정신역동적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데 장기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치료 효과가 적은 경우가 많다. 상담과정에서 지각과 통찰을 얻고 활용해야 하는 정신분석은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이 요구되며, 이미 생활양상이 무너진 사람이나 심각한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증세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최근 심리치료로는 인지행동치료법(CBT)이 1차적으로 선택되는데 정신분석에 비해 비용과 시간 대비 효율이 월등한 것으로 연구가 많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정신질환과 뇌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의료현장에서는 심리치료보다는 약물 처방을 중심으로 한 치료가 점차 강화되는 추세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서 기술 진보는 우리의 내적 목소리를 통제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진정한 자아나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지능이나 감정, 의식 등도 결국 생화학적, 정보처리의 알고리즘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정신의학이 여러 내적 충동과 감정을 생물학적, 신경학적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흐름과도 연결된다.
요즘은 너무나도 손쉽게 항우울제로 감정을 조절하고 신경안정제로 충동성을 낮추고 ADHD 약물로 집중력을 강화한다. 마음의 현상을 뇌의 작용의 산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화될수록 앞선 하라리의 말은 더욱더 설득력을 얻는다.
예술이 지키는 인간다움
루이스 부르주아의 ‘승화’의 마지막 장에서는 승화를 예술가에게 내려진 축복이라 표현한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승화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작업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예술가는 이 능력을 축복으로 받았다.”
물론 너무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보다 때로는 머리를 비우고 가볍게 내려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내적갈등이 있다면 인위적으로 잠재울 필요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약물에게 자아에 대한 과도한 주도권을 주는 것은 나다움을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측면도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오랜 시간 자신의 내면을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며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어쩌면 인간다움이란 고통을 직면하며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려는 그 시지프적 노력 속에서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