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의 로망

by 네맘


​거울 속의 나는 낯설지만 근사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발 섞인 머리칼은 마치 지난 세월의 억압을 보상받는 훈장 같았다. 70년대, 경찰의 이발기를 피해 골목을 누비던 청년은 이제 백발의 신사가 되어 비로소 '장발'이라는 소박한 반항이자 로망을 완성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것은 정년퇴직이 내게 준 가장 달콤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들의 학교 교문 앞에서 순식간에 씁쓸한 뒷맛으로 변했다.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였으나, 아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몸을 돌려 다시 교실 쪽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다시 나온 아들의 손에는 구겨진 공책이 들려 있었다.


"알림장을 두고 와서 다시 갔다 왔어요."


아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곁을 지나던 아들의 친구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누구 찾으세요?"


​그 짧은 질문은 내 자부심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아들이 교실로 되돌아갔던 건 알림장 때문이 아니었다.

긴 머리에 나이 들어 보이는 아빠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그 어린 마음의 난처함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아들은 아빠가 상처받을까 봐 차마 '창피하다'는 말 대신 알림장 핑계를 대며 홀로 그 무거운 마음을 삼켰던 것이다.


​마주 앉아 피자를 먹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은 내 눈을 피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 친구들 아빠처럼 머리 짧게 자르면 안 돼요?"


​그 순간, 나는 아들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미안함과 간절함을 보았다. 나의 로망이 아이에게는 남모를 짐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짐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던 여덟 살 아이의 배려가 내 가슴을 날카롭게 베었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이기적인 고집이었다.


​나는 그 길로 아들의 손을 잡고 미용실로 향했다.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은빛 머리카락들은 내가 오랫동안 집착해 온 '나만의 만족'이었다. 단정한 짧은 머리에 짙은 색으로 염색을 마친 나를 보며, 아들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겼다. 그 미소는 내가 기른 그 어떤 머리칼보다 찬란했고 멋스러웠다.


진정한 어른의 멋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데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로망조차 기꺼이 깎아낼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배려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빛나는 가치라는 것을 아들의 미소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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