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발걸음

by 이경오

‘그 순간, 어니스트의 얼굴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생각에 일치되어, 자비심이 섞인 장엄한 표정을 지었다.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지혜로운 시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작가로도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短篇)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의 일부분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교과서 속 이 작품에 이르러서는 유난히도 목소리가 더 진중(鎭重)해졌던 듯합니다. 작품 속 주인공 어니스트는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예언을 완성할 인물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용맹한 장군, 뛰어난 웅변술을 지닌 정치인, 유명한 시인 등을 차례로 마주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결국 예언의 인물은 그 어떤 이도 아닌 평생토록 묵묵히 겸손한 마음으로 삶을 가꾸어 온 어니스트 그 자신이더라는 뭐 그런 이야기였지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조용히 일러주는 작가의 이야기에 아이들 역시 숙연한 눈빛으로 지그시 귀를 기울이던 모습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까까머리 학창 시절, 친구들과 둘러앉아 비록 호랑이처럼 가죽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름 석 자는 남기지 않아야겠냐며 너스레를 떨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그 시절 아이들 머릿속에는 후세에 기억될 만한 멋진 업적을 쌓아가며, 그 명예(名譽)를 널리 떨치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한 갑자(甲子)를 훌쩍 돌아서 생각해 보니, 그것 못지않게 소중하고도 중요한 가치(價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온갖 세파(世波)에 부딪히노라면 슬그머니 못난 욕심이 고개를 치켜들기도 하고, 때로는 포기하거나 우회(迂回)하고 싶은 충동도 들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용기 역시 삶의 줏대가 되었던 게 분명하니 말입니다.


‘"준비하면 기회 온다"... '영원한 현역' 이순재 91세로 별세…’

한 원로 배우의 별세 소식이 눅눅하게 엉겨 붙던 새벽잠을 단번에 달아나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니, ‘영원한 현역’이란 별칭이 따라다닐 만큼 이분 역시 꿋꿋이 당신 삶의 여정(旅程)을 꾸려오셨던 모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깊이 고개 숙이는 건 그분이 남긴 이름이 아니라 묵묵히 걸어온 그분의 발걸음일 듯합니다.



관련 기사 : "준비하면 기회 온다"... '영원한 현역' 이순재 91세로 별세 / 조선일보 (2025.11.25.)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5/11/25/PAXYF4YAE5HFXM2IHLBDSTVM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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