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by 이경오

이젠 어엿한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한 만큼 그 명성에 걸맞게 워낙 다양한 체험거리가 곳곳에 널려 있으니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게 되었습니다만, 예전에는 ‘문화 교실’이라는 이름 아래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러 가는 날도 있었지요. 오죽했으면 학교 체험 행사의 명칭을 그렇게 붙였겠습니까만, 문화 활동을 직접 몸으로 대할 공간이나 여유가 얼마나 부족했던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터이지요. 사실 요즘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들이야 굳이 학생 동원에까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에 있을까 싶습니다만, 주머니 사정이 열악했던 그 시절 중소 규모의 극장들은 무리 지어 들어오는 학생 관람객들이 무척이나 반갑고도 큰 손님이었을 게 분명합니다. 어쨌든 그런 날이면 아이들의 얼굴에는 한껏 들뜬 미소가 내내 떠나질 않았고, 사정이 그러한 탓에 영화관 직원들은 영화는 뒷전인 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잠시도 궁둥이를 가만히 붙여두지 못하는 악동(惡童) 손님들조차도 지그시 타일러 앉혀 두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통에 지켜보던 선생님들조차 좌불안석(坐不安席)일 수밖에 없었지요.


설 연휴를 거치며 오랜만에 천만 관객의 가능성을 보이는 영화 한 편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평소 극장을 찾는 발길이 뜸한 이 사람조차 엉겁결에 따라나서고 말았습니다. 숙부의 위력에 의해 폐위(廢位)되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 단종(端宗)에 관한 사연이야 학창 시절부터 여러 차례 들어왔던 터입니다만, 그 뻔한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나 감독의 창의(創意)가 참으로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물론 영화 장르가 가진 허구(虛構)라는 특성으로 포장된 작품이긴 합니다만, 그 속에서 부딪히는 세세한 인정(人情)이나 섬뜩하리만치 날 선 갈등(葛藤)의 모습은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지켜보는 듯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던 기억도 선명하게 남고 말았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 강원도 영월… 청령포·장릉… 비운의 왕 ‘단종 오빠’의 恨‘


마침 인생 2막의 출발점과 함께 가입한 한 NGO 단체의 모임이 앞선 그 역사 속 장소 부근에서 며칠간 진행된다기에 성큼 따라나서고 보니, 매일 아침같이 꾸역꾸역 쏟아놓던 이야기 마당도 덩달아 휴식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발 빠른 한 기자의 영화 관련 기사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통에 겨울 막바지 엉어리진 아쉬움을 뱉어내듯 추적추적 눈발이 흘러내리던 날의 기행(紀行)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됩니다. 똬리를 틀 듯 굽이굽이 흘러내려 가는 여울 소리 속에서 비운의 왕을 추모하던 인간 ‘엄흥도’의 서러움을 느끼려 애쓰던 기억을.




관련 기사 : ‘왕과 사는 남자’ 강원도 영월… 청령포·장릉… 비운의 왕 ‘단종 오빠’의 恨 / 국민일보(2026.02.26.)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71982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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