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어머니…’

<주말 추억 글 마당 - 2021. 04. 20.(화)에 쓴 글입니다.>

by 이경오

물론 근대 이후 여성의 활발한 사회 중심부로의 진출이 그 원동력이 되었을 터입니다만, 어쨌든 ‘양성평등’이란 용어가 이젠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우리네 문화 속에서도 성 인지 감수성이 꽤 큰 진전을 이루어온 게 분명하다 싶습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家父長制)가 주도하던 예전 농경사회에서야 어디 여성 인권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선뜻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있기나 했겠습니까. 아마도 대대로 전하는 집안 전통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 터이지만, 사회에 전반(全般)에 만연해 있던 남아 선호 사상 탓에 친가에서는 딸이라는 사실로 인해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시집을 가서도 역시나 고된 시집살이에 고추 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로 가슴속에 쌓인 푸념을 홀로 삭이기 일쑤였을 터이니,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세대가 겪었던 고초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건강이 좋질 않아 꽤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시는 선배 한 분이 계십니다. 사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병상에 눕게 되면, 아픈 사람 그 자신은 차치하고라도 못지않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초를 겪는 이가 대개는 그 집안의 안주인들이지요. 그 선배 역시 그러한 경우인지라 거의 매일 선배 옆을 지키느라 고생하시는 그 사모님을 뵙노라면, 오랜 시부모 수발의 노고에서 이제 벗어나려 할 즈음 남편분의 병간호까지 도맡게 되었으니, 곁에서 오히려 그 사모님의 건강이 더 상하지나 않으실까 걱정이 되곤 합니다. 그래도 늘 뵐 때마다 오히려 긍정적인 모습으로 묵묵히 어린 손주까지 챙기시는 걸 보면서, 아마도 초로에 접어든 우리 세대가 새로운 문화의 시대로 건너가는 과도기 역할을 짊어지고 있는 탓에 생겨 나는 안타까운 현상이리라 짐작하면서도 가슴 한쪽 언저리가 먹먹해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영화 ‘집으로’ 김을분 할머니 별세‘


언젠가 이곳 글 마당을 통해 말도 못 하고 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손주에 대한 애잔한 사랑을 펼치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영화 한 편을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이 있었더니, 그 주인공으로 나오셨던 할머니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또 한 세대가 흘러가는 모양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양성평등’ 역시 당연히 챙겨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닌가 싶어 괜스레 고개만 주억거리게 됩니다. 오랜 세월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그렇듯 자신일랑 내려놓고, 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 온 그 귀하고도 아름다운 배려의 가치를 결코 소홀히 여기거나 잊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휘몰아 드니 말입니다.




관련 기사 : 영화 ‘집으로’ 김을분 할머니 별세 / 헤럴드경제(2021.04.19.)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1041900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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