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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항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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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Feb 12. 2023

바다에서 표류하다,
세 번째 이야기

새로운 고난의 시작




배에서의 근무 - 육지와는 다른 개념


배에서의 출, 퇴근은 육지와 약간 다르다. 배에는 크게 항해를 책임지는 '갑판부'와 엔진을 책임지는 '기관부' 이렇게 두 부서가 있는데 여기서는 부원들을 제외한 사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항해 파트는 항해 시 선장님을 제외한 일항사, 이항사, 삼항사가 00:00~04:00 / 04:00~08:00 / 08:00~12:00 / 12:00~16:00 / 16:00~20:00 / 20:00~24:00 이렇게 네 시간씩 시간을 나누어 하루에 두 번씩 당직을 서게 된다. 물론 정박 시에는 이 시간에 맞추어 정박 업무나 입출항 서류 준비를 하게 되고 근무 시간에 일이 없으면 상륙을 나가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교대 근무다. 교대로 근무하기에 서로 일을 같이 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반면 기관부는 이와 반대로 거의 동시에 일을 같이 하게 된다. 상태가 좋지 않은 노후 선박은 기관부도 갑판부와 마찬가지로 당직 근무를 서지만 요즘 대다수의 배는 상태가 좋고 자는 중에도 방으로 기기의 알람을 보내줄 수 있기에 모두 다 같이 08:00시에 출근하여 17:00시에 퇴근하고 퇴근 후에는 일기사, 이기사, 삼기사가 한 명씩 번갈아가며 본인의 방으로 알람을 받을 수 있게 세팅을 하고 밤에 내려가 한 번씩 순찰을 도는 당직 근무 형식으로 일을 한다. 물론 기관부도 정박 시에는 다 같이 정박 시 필요한 수리 작업을 하거나 기름 등을 받고 일이 없을 시에는 상륙을 나가기도 한다.


간단한 선내 조직도


자 그리고 추가로 특별한 점이 있다.


퇴근 후 집에 가는 개념이 없다. 당연히 계약기간 중에는 배에 승선해 있는 상황이기에 일을 마친 후에는 거주구역(Accommodation)*으로 올라가서 각자의 방으로 가게 되는데 퇴근 후 상사의 방이 옆방이다. 또 그 옆방은 상사의 상사의 방이다. 방까지 넘어가는데 몇 분이 아닌 몇 초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상사가 좋은 사람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모든 상사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퇴근을 해도 상사와 같이, 출근을 해도 상사와 같이. 그 공간에서도 몇 개월 동안 같이 지내게 된다. 상당히 폐쇄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역경의 시작 - 기관장님


기관부 최고참인 기관장님의 존재가 나의 새로운 힘듦이었다.


부원과 실습생을 제외한 기관사 중 제일 막내였기에 일이 힘든 건 이해했다. 어느 조직이던 신입은 일을 배워야 하는 기간이기에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단지 막내여서 일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실제 나는 3년의 군 특례기간이 끝나자마자 해기사 생활을 그만두는 대다수의 사람과는 달리 그 기간이 끝난 후에도 3년가량을 더 배를 계속 탔었기에 배에서의 노동의 힘듦 정도는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이 요구하는 게 남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 공간에서 두 달을 버텼나 싶다.


그 당시 우리 배는 물이 부족하여 단수를 하는 상황이었기에 오전에 한, 두 시간의 기기의 상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순찰 및 정비만을 하였고 오후에는 기관부 전체가 E.C.R*에 모여 '지르박*'이라는 춤을 춰야만 했다.


본인이 1기사때 승선했었던 배의 E.C.R


지르박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단어였다.


심지어 기관장님의 춤 연습 때문에 나는 여성의 파트를 동영상 자료로 학습해야 했고 기관장님과 파트너로 춤을 춰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냥 사회생활이려니 하고 춤을 배워가며 맞춰드렸었다. 그랬더니 요구하시는 게 하나씩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밤 10시, 11시까지 내 개인 시간은 전혀 가질 수가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 당시 그분과 함께한 일들을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업무 시간에 기관장님 춤 연습을 위한 지르박 여성 파트 춤 공부 및 연습

2. 퇴근 후 기관장님 탁구 경기 점수 세기 - 나는 탁구를 치지 않음

3. 탁구 후 선박 2바퀴 같이 걷기

4. 음주 - 추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자 생수를 마시며 그 자리에 필참 하라고 함

5. 바둑 

6. 야식  


와 내가 기억을 되돌려 쓰면서도 이건 너무한다 싶다.

물론 이 암울한 상황에서 현실의 힘듦을 잊기 위해 시간을 죽여야 하는 걸 이해는 한다. 하지만 기관장인 본인과 달리 나는 군 특례 중이었기에 군 대체복무를 이어가려면 새로운 회사를 찾는 게 필수적이었고 너무나도 불안한 미래에 떨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힘듦에 기관장님이라는 새로운 힘듦이 추가되어 정말 살이 쪽쪽 빠지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몇 년 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건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기관장님의 갑질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선택지가 없었다. 몇 달을 그 사람과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아야 하는데 사회 초년생이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때 얻는 여러 가지 페널티들이 두려웠었다.


그렇게 기관장님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지속될수록 나의 우울함은 급속도로 커져만 갔고 회사의 상황도 역시나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나에게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Accommodation - 거주구역 : 선원의 거주 구역을 말하며 썸네일 사진의 오른쪽 위에 하얗게 솓아 있는 부분이다.

* E.C.R - Engine control room : 기관부의 일의 터전, 저기서 문만 열고 나가면 굉음이 들리는  기관실이다. 사진을 참고해 보면 양쪽의 모니터와 여러 게이지들을 보며 배의 전반적인 정보를 보며 현재 각종 엔진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 지르박 -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한 사교춤. 4분의 4 박자의 속도에 맞추어 남녀가 다가서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자유로운 동작을 가미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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