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정 May 15. 2023

규슈 1일 차, 인천공항에서 사가까지

규슈 한일 고대사 여행기

2023년 4월 오후, 일본 규슈 후쿠오카 공항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봄비 내리는 소리에 팬데믹 이후 첫 여행이라 감회가 새롭다.

규슈 여행은 이번이 네번째이다.

지난 여행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 속에 떠올랐다.


지난 세 번의 규슈여행의 기억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남편은 "일본 본토를 들어가지 않겠다!" , "일본산 농수산물을 먹지 않겠다!" 선언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대만 타이페이 등을 돌다가  2017년부터 규슈를 집중 여행하기 시작했다.

일본 본토에서 떨어진 남단 외딴 곳이나, 고대 이래 일본이 국제세계와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반도와 가까워 왜국 건국 전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규슈에서 일본은 세계를 만났고, 변화의 시대 그 흐름을 제일 먼저 포착했다.

'야요이 시대' 한반도에서 벼농사 재배기술이 가장 먼저 넘어와 일본 사회의 생산력을 변화시킨 곳도 규슈다.

16세기 나가사키현에서는 네덜란드 등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제도 혁신은 사이고 다카모리 등 가고시마 출신의 인물들이 주도했다.

규슈는 한일 관계 및 일본 근대화와 관련, 정치적,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 테마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취향과 들어맞는 곳이었다.  


첫여행은 2017년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 히가다'라는 시골에 위치한 '하마젠 료칸'이 있는 온천마을이었다.

'유후인', '벳푸' 등 규슈 유명 온천 여행지들이 있지만, 우리 부부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여행이 주목적이 아닌 답사'라는 취지와도 맞지 않아 남편이 여러 한국사 자료와 일본 포털을 며칠씩 뒤져 어렵게 찾아낸 곳이 그곳이었다.

'부산'을 거쳐 '대마도' 입도 후 '후쿠오카', '야쓰시로', '구마모토'로 이어지는 꽤 동선이 복잡한 여행이었다.


'대마도'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묘와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등 구한말 우리의 아픈 역사와 '조선통신사 입도 기념비' 등의 역사 유적을 만날 수 있었다.


<좌> 대마도에 세워진 조선통신사 입도 기념비 , <중> 대마도 '수선사'라는 사찰 묘역에 조성된 '면암 최익현 선생' 묘 , <우>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구마모토'는 과거 임진왜란 당시 제2군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 加藤淸正)의 영지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 小西行長)의 영지를 비롯, 규슈의 곳곳을 가증 받은 후 구마모토는 이른바 '가토 기요마사 세력의 중심지' 였으며 '가토에 의한 규슈의 중심'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축성된, 그리고 2017년 발생한 지진으로 훼파된 '구마모토성'과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을 보며 여러 상념이 떠오르기도 했던 답사였다.

(남편은 당시에 "옛날부터 못된 짓을 했으니 지진이라는 벌을 받은 것"이라 했지만 문화재가 훼파된 모습에 만감이 교차한 건 다를 바 없었다.)


2017년 규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진 구마모토성의 모습 1.
2017년 규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진 구마모토성의 모습 2.
2017년 규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진 구마모토성의 잔해와 복구 모습 1.
2017년 규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출입이 통제된 구마모토성 구역 일부와 성문 앞에 세워져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


2018년에는 규슈의 '나가사키'를 답사했다.

'나가사키'의 답사 키워드는 '일본 근대화'와 '천주교', '원자폭탄'이었다.  

‘나가사키'는 이른바 '흑선'(黒船 , ろふね)이 들어오고 '데지마 상관'이 설치되어 '서양 배우기'가 일찍이 시작된 곳이다.


<좌> 일본인 화가 히바타 오스케(樋畑翁輔)가 1853년 내항 직후 그린 미 해군 페리 제독의 흑선 , <우> 일본 민간인이 그린 흑선 - 출처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흑선 : 흑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634년경 일본 개항 이후 나가사키에 조성된 '데지마 상관' - 출처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데지마 상관 : 데지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또한 나가사키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고장이기도 하다.

17세기, 일본 카톨릭의 순교 역사를 소설적으로 탁월하게 그려낸 소설.

(2016년에는 마틴 스콜세지가 '사이런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하였다.)

'나가사키시 소토메'에는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있다.


<좌&중>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전시된 그림과 십자가상 복제품 , <우> 엔도 슈사쿠 문학관 입구에 조성된 '침묵의 비'

'나가사키 소토메'에 있는 침묵의 비에 쓰여진 "人間がこんなに哀しいのに,主よ,海があまりに碧いのです。"(인간이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

그 바다와 그 문장과 일본 카톨릭의 역사가 아직도 선명하지만 아련한 슬픔으로 내게 남아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영화화 한 '사일런스'의 한 장면(로드리게스 신부 역의 앤드루 가필드(좌) 앞에서 기치지로 역의 구보즈카 요스케(우)가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다.)

영화 사일런스 사진 출처 : ‘사일런스’, 종교에 대한 근본적 질문 : 영화·애니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에서는 원폭 피해의 참상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의 반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늘 궁금한 것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였다.   


<좌> 나가사키 평화공원 조각상 , <중>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 <우>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설명문(설명문 하단 나가사키 제일조선인 인권회라고 되어 있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 마지막 규슈 답사는 2019년 가고시마였다.

가고시마 답사 키워드는 근대화, 사쓰마번, 한일정상회담, 심수관.


가고시마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중요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이다.

그는 '사쓰마번의 하급무사'였으나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고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 후 할복하였다.

가고시마 곳곳은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났다.

당시 그의 일생을 다룬 하야시 마리코의 소설 <세고돈!(西郷どん!)>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때라, 여기저기 드라마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가고시마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현재적 영웅'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한일 관계의 매개고리가 되었던 인물이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심수관가이다.

2004년 도쿄가 아닌,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열린 배경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전 총리가 만나 정상회담을 했던 백수관 호텔에서 커피 한 잔을 했고, 심수관요가 있던 미야마 마을을 찾기도 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님께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던 가고시마 료칸 호텔 '백수관' 전경

그리고 이번 여행.

규슈는 일본의 4번째 섬으로 후쿠오카,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이타, 미야자키, 사가현, 가고시마.

모두 7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이타현과 사가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발을 내딛어 보기는 했다.

최근 나는 가야, 마한, 탐라 등의 기원 후 6세기 전까지 한반도 남쪽에 존재했던 나라들에 관심을 갖고 답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들 나라와 왜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규슈를 보고 싶었다.


후쿠오카에서 다자이후로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어렵게 찾은 닛산 렌트카에서 차를 인수한 후 첫 방문지는 다자이후에 있는 국립규슈박물관이다.

후쿠오카에서 다자이후까지는 30여분 걸린다.


다자이후는 고대 일본의 서쪽 도읍으로 중심지였다.

7세기 관청 터와 토성(미즈키성, 오즈노성)이 남아있다.

백제관청을 본떠 조성되었다. 이 관청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다.

지금은 '학문의 신'을 모셨다고 하는 신사인 '다자이후 천만궁'이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유명하다.

국립규슈박물관 전경(방문 관람시 받은 한국어 리플릿에 삽입된 사진이다.)

국립규슈박물관은 도쿄, 나라, 교토에 이어 4번째 국립박물관으로 2005년에 개관한 곳이다.

국립나라박물관 이후 108년 만에 신축된 국립 박물관으로 산맥을 이미지화 한 곡선형 지붕과 2중 유리 구조의 외벽으로 된 거대한 건물이 특징이다.

규모는 일본 국립 박물관 가운데 최대급이다.


이곳은 중국과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국제 세계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특징을 살렸다.

일본 문화의 형성을 아시아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한다는 컨셉에서 상설전시로 4층에  '문화교류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구석기에서 죠몬 시대, 야요이 시대에서 고훈 시대, 아스카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서 무로마치 막부 시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 막부 시대까지다.

우리는 한반도 고대사와 관련해서 첫번째와 두번째 테마를 눈여겨보았다.


상설전시를 1시간 동안 살펴보았다.

관람료가 700엔이니 우리 돈으로 7천원 상당이다.

우리 국립 박물관의 상설전시가 무료로 운영되는 것과 비교가 되었다.

여기에 특별전(odes to Nature)은  1,400엔이니 15,000원이다.

비싸서 패스했다.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이곳에서 가야 관련 전시가 있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가야전이 왔다.

박물관 뮤지엄샵의 도록에서 본 도래인에 대한 기술이 재밌다.

국립규슈박물관 가야전 전시 리플릿(한글로 표기된 '가야'라는 문자가 선명하다.)


한반도에서의 도래인

일본인들이 쓰는 도래인, 한자어를 풀자면 건너서 온 사람이다.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온 사람들이다.

한반도에서 온 사람이건, 중국에서 온 사람이건,  일본의 입장에서는 도래인이다.

사방이 넓은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 열도의 특성상 외부로부터 온 모든 사람과 문화가 바다를 건너오게 마련이다.


일본인들은 도래인의 발자취를 되짚어 대외 교류의 관점에서 일본의 문화 형성 과정을 밝히기도 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 문화적 우월감을 갖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남편은 국립규슈박물관을 둘러보며 '우리나라 백제의 '미마지'로 부터 문화를 전래받은 주제에 자랑질을 하고 있다.'며 툴툴거렸다.)

그러나 원래 문화는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문화 또한 ‘스키타이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며 성장했고, 중국으로부터 온 사람들과 그 문화를 받아들이며 성장한 사실을 기억하자.


일본인들은 도래인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국립규슈박물관의 상설 전시실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규슈박물관에는 한반도에서 넘어간 도래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4.28일부터 6.25일까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리는 '바다를 건넌 가야인'전에 전시되고 있다. 전시 끝나기 전에 도록에 실린 그 작품들을 보러 가야겠다.)


우리나라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바다를 건넌 가야인' 전시 유물 '하니와'와 전시 안내 리플릿

6세기 일본 고훈시대 무덤에 서 있던 '하니와'다.

지바현 야마쿠라 1호분에서 나왔다.

뽀족한 삼각형의 천관을 썼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하고 있다.

상의은 오른쪽 앞에서 여며서 두 군데를 끈으로 묶어 고정했고 손이 가려지는 통소매다.

하의는 바지통을 끈으로 묶지 않는 형태의 바지를 입었고 발끝이 위로 올라간 신발을 신었다.

다른 '하니와'와는 크게 다른 복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하니와는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래인의 모습이라 한다.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 여성의 모습으로 보이는 '하니와'도 있다.

이것은 나라현 니자와센즈카 126호분에 묻힌 5세기 후반무렵의 여성이다.

이 여성은 금사슬을 매단 금제 드리개 달린 귀걸이를 하고 곱은 옥을 차고 있다.

이런 다양한 치장을 한 것을 보니 이 여성은 도래인으로서신분이 높은 여성이다.


왜 도래했을까.

집단 이주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 이루어진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 조선'에 패하고 내려와 만든 것이 '한'이다.

마찬가지로 금관가야나 대가야가 멸망하거나, 마한 소국들이 백제에 복속되는 과정에서 권력을 잃고 생존마저 위협 받았던 이들은 험한 바다를 건너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를 결단했을 것이다.

도래인들이 정치적 세력을 갖고 열도 내를 장악하기도, 또는 왜인들의 집단과 공존하기도 했고, 또는 왜의 유력집단에 등용되어 기술혁신의 실질적 추동자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 고데라', '이케노우에 분묘군'은 도래인 묘역으로서 고훈 시대 전기(4세기) 이래 이어져온 왜인의 묘역과 공존하였다 한다.

이곳의 '쓰쓰미토쇼지 고분'에 묻힌 유력자는 가야에서 온도래인을 등용하여 토기, 토목기술, 방적 등 신기술을 발전시켰으니 왜인과 도래인이 협력하여 생활한 사례이다.  


도래인들이 가져온 기술 중에 일본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 벼농사 기술이다.

이 기술은 일본 열도에 '야요이 시대'의 문을 열었다.

'사가현 하부 유적군'에서는 단단하게 굳은 대지를 일구는 밭갈이에 사용된 '따비' 등이 나왔다.

한반도의 '민무늬 토기'와 유사한 토기군이 다수 발견되기도 한다.

'후쿠오카현 니시진마치 유적'은 '야요이 시대 말기'부터 '고훈시대 초기'에 걸친 취락 유적이다.


기술혁신의 중요한 부분이 토기이다.

토기는 중요한 당시의 기술이다.

한반도에서 발달한 '도질토기'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스에키'가 탄생했다. 그것이 5세기다.

'오사카부의 스에무'라는 대규모 '스에키 생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특히 '오바데라 유적'에서 가야토기와 마한토기의 영향이 보인다.


도래인이 일으킨 변화 중 음식문화 혁명이 있다.

부뚜막과 시루의 전파이다.

일본의 '고훈시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부뚜막이 일본의 가옥 여기저기에서 확인된다.

찜 요리에 사용된 시루는 새로운 조리방식으로 일본 열도에 정착했다.

날 것에서 찐 것으로 음식문화의 혁명이 일어났다.


말과 소도 함께 갔다.

일본에 남아있는 무덤에는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의 벽화에 배에 올라탄 말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많은 소와 말이 바다를 건넜다. 도래 소, 도래 말이다.


도래인의 존재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문화의 장구함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넓은 바다를 건너 지속해서 도래의 파도가 밀려왔다.

'죠몬 시대 후기'부터 '야요이 시대' 기술혁신을 내포한 교류의 시대가 열렸다.

도래인들은 그 건너온 이유는 다양할 것이지만, 그들은 일본에서 고립된 존재가 아닌 왜인과 뒤섞여 함께 생활을 영위했다.

일본은 왜인이 성장시킨 '재래 문화'와 도래인이 가져온 '외래 문화'가 밀접하게 관련을 지으며 일본 문화를 형성해왔다.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서로 다른 문화를 접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는 번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


국립규슈박물관을 나오니 거의 5시가 다 되었다.

비가 오기도 하고 숙소가 있는 사가까지 이동해야 하는 일도 있어서 원래 예정했던 다자이후 정청터, 천만궁 방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비 오는 다자이후 천만궁 입구


사가에서 만난 오토바이 배달원 청년의 친절

'다자이후'에서 '사가'까지는 거의 1시간이 걸렸다.

사가는 일본인들에게 여행한 적 없는 현 1위에 꼽힐 정도로 외지다.

현내 7개의 시, 37정, 5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과 관련한 유적지가 많은 편이다.

최초로 한반도에서 벼재배 기술이 넘어간 '야요이 문화'가 남아있는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지', '백제 무령왕'이 탄생지로 알려진 '가카라시마', 임진왜란 때 도요데미 히데요시가 출병한 '히젠 나고야성', 조선시대 도공 이삼성이 끌려가 일구어낸 '아리타 도자기 마을'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의 발길을 끄는 현이다.   


우리의 루틴은 동일하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푼 후 대욕장에서 여독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

저녁은 '왠만하면 거하고 여유있게' 먹고 싶었다.

남편은 숙소 근처의 '토리후미'라는 '야키토리 주점'을 찾았다.

비는 오는데 30분을 길에서 헤맸다.

빗길 속을 헤매다 만난 일본인 오토바이 배달원 청년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그 청년을 길을 헤매는 가운데 두 번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잘못된 방향을 알려줬다.

그가 알려준 방향에서 헤매고 있을 때 다시 만났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오토바이를 끌며 '토리후미'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숙소에서 고작 200미터 거리.

우리가 배달원 청년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자리.

몇 개의 조명등이 입구를 밝힌 채, 어떠한 간판도 없는 곳.

아마도 그는 우리에게 잘못된 길을 안내한 후 마음이 내내 불편했나 보다.

두번째 우리를 만났을 때 번거롭지만 우리를 안내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곤궁에 빠져있는 약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오토바이 배달원 청년에게서 그 선한 마음을 느꼈다.

토미후리 내부모습

'토리후미'는 긴 '다찌'에 앉아 저녁을 겸한 안주와 함께 나란히 앉아 술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다.

모던한 느낌의 인테리어와 실내의 정돈된 모습은 비록 사가현이라는 일본의 시골마을이지만 말 그대로 '일본의 저녁 문화'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네번째 규슈 여행, 그 첫날은 이렇게 저물렀다.

작가의 이전글 규슈 3일 차, 다시 만난 다자이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