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한일 고대사 여행기
2023년 4월 26일, 규슈 한일 고대사 여행 둘째 날.
오전 일찍 숙소 근처 '사가성터'와 '혼마루 역사관'(무료 관람)을 다녀왔다.
사가번주였던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동상과 그가 네덜란드 군함과 상선이 사가 인근 나가사키에 입항했을때 승선하여 견학하는 사진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오전 10시경,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동상이 세워진 '사가성터' 입구에서 이번 답사의 주목적인 '왕인 천만궁'(왕인 신사)과 '요시노가리'로 출발했다.
'왕인 천만궁'과 '요시노가리'가 있는 '사가현 간자키시'는 사가시 중심부에서 약 20킬로미터.
자동차로 30여분 걸린다. '후쿠오카'에서는 1시간이 넘는 거리다.
후쿠오카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쉽게 오기는 힘든 이곳 '사가시'에서 하루를 묵고 다녀오는 것도 일본의 지방도시를 즐기기에 좋은 방법일 듯.
왕인 천만궁 : 도래 지식인의 흔적
왕인 박사. 당시 '응신 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에 '종요 천자문'과 '유학'을 전달하여 일본 학문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기록이 없고 <고사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전남 영암 일대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굳혀져 있다.
<고사기> 번역본에는 '응신 천황' 때 '와니키시'가 왔고 '논어 열 권, 천자문 한 권, 모두 열한 권을 같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인 천만궁'이 있던 마을 입구에 2018년 '왕인현창공원'이 조성되었다. 왕인 박사가 활동했다는 전라남도 영암군과 '사가현 간자키시'가 협력해서 조성한 공원이다.
'왕인현창공원'에서 '왕인 천만궁' 방향으로 오솔길이 있어, '왕인현창공원'을 둘러보고 5분 정도 남짓 걸으면 '왕인 천만궁'을 볼 수 있다.
'왕인현창공원'에는 '백제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왕인 박사'를 백제의 인물로 보는 역사적 접근이다.(최근 왕인 박사가 활동하던 시절 영산강 유역까지 백제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면, 왕인은 당시 영산강 유역을 지배하던 마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백제문'을 지나면 왕인이 일본에 전했다는 당시의 '종요 천자문'이 빼곡히 쓰인 조형물이 있고, 왕인이 썼다는 모자를 형상화한 기념비가 '왕인 천만궁' 방향으로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누군가는 한류 원조라고도 하는, 바다 건너 섬나라에 지식을 전수한 한 지식인의 삶은 어떠했을까.
일본에서는 왕인을 와니라 부른다.
조형물과 기념비를 둘러본 후 작은 샛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왕인 천만궁'이 보인다. 마당에 선 나뭇잎들이 푸릇푸릇하다. 조금만 더 돌면 '왕인 천만궁'이다.
일본의 신사(천만궁) 입구에서 흔히 보는 '도리이'가 보인다.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두 개의 기둥과 기둥 꼭대기를 연결하는 가로대.
낮으막한 계단이 보이고 그 끝에는 마당과 함께 누각이 보인다. 누각에는 일본의 한 화가가 기증한 '왕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뒷마당에는 이 마을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들이 후손의 꽃과 함께 바쳐져 있다. 일본 고유의 문화인 듯하다.
'왕인 천만궁'이 왜 규슈 서쪽 외딴 마을에 있는 것일까.
'아스카 시대', 왕인 박사가 활동했다는 오사카 일대에는 묘, 신사, 공원들이 있어 한 도래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영산강 상대포'에서 출발한 왕인 박사가 오사카 일대로 들어가는 중간 기착지로 잠깐 머문 곳일까?
왕인 박사와 관련된 집단이 이곳에 정착한 것일까?
아니면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 설화일까?
정확한 내력은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도리이 옆 이곳의 내력이 기록된 안내문에는 ‘이곳에 오래전부터 왕인 천만궁이라는 비석이 남아있었다.’고 하니, 완전 만들어진 역사라고 폄하할 일도 아니다.
요시노가리 : 야요이의 소리가 들린다.
'왕인현창공원'과 '왕인 천만궁'을 답사한 후, 차로 5분 거리 근처에 있는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으로 이동했다. 고대국가 형성 전 야요이시대 유적지를 복원한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학술적 가치가 높아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유적지다.
특히 '야요이 시대'는 한반도와 중국 남부로부터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들이 벼농사 기술 등을 전래하여 형성된 시대이다. 우리와도 연관이 있기에 특히나 관심이 가는 지역이다.
방향으로 사방을 구분하는 일본인의 선호를 따라 동서남북 입구가 모두 네 곳이다.
동쪽 입구, 서쪽 입구, 남쪽 입구, 북쪽 입구가 다 다르다. 관람객들은 동쪽 입구를 통해 진입할 수 있다.
동쪽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는 입구를 찾아 계단을 오르면 된다.
입장권 가격은 일반 성인 460엔이다. 주차비는 310엔이다.
우리는 오전 11시 30분경 '요시노가리'에 도착했다.
입장권을 확인받고 공원 내부로 들어오면 구름다리가 나오고 환호취락이 펼쳐진다.
전시실, 남내곽, 북내곽, 중간마을을 거쳐 '요시노가리'의 하이라이트인 북분구묘까지 관람하면 '야요이 시대'와 관련된 곳들은 모두 둘러본 셈이다.
'요시노가리' 남내곽이나 북내곽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늘 '도리이'가 있고 '도리이' 위에는 새가 앉아 있다.
새는 신성함의 상징이다. 새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우리 한반도의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소도'에도 긴 장대에 새가 앉아있는 솟대를 세워 이 공간만의 신성함을 표현했다.
'남내곽'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하는 지역으로 '수혈식 주거'와 '망루' 등이 복원되어 있다.
'수혈식 주거'도 음식을 만드는 공간, 옷감을 짜는 공간들도 구체화했다.
'남내곽'과 '북내곽' 사이에 조성되어 있는 중간마을에는 고상 가옥, 고상 창고 등이 줄지어 서 있다.
'북내곽'은 공동체의 공적인 시설들이 있었던 곳들을 복원했다
가장 높고 가장 큰 건물이 가장 중요한 공간인 주제전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도자들이 중요한 일들을 의논하거나 최고 사제가 조상의 혼령에게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집행하는 모습이 구현되어 있다. 그런데 '최고사제'가 '여성 무녀'다.
무녀는 나무 덩굴을 몸에 두른 상태로 작은 대나무를 들고 거문고 소리에 맞춰 신내림을 받고 있었다.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무녀의 수행원들이 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전시실 자료에 따르면 발굴과정에서 제사장이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 흔적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북내곽'을 지나 '북분구묘'로 가는 길에는 발굴된 옹관들이 땅바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렇게 죽음은 일상화되는 것인가. 왕들, 수장급들의 옹관은 이곳이 아닌 북분구묘 안에 있다.
북분구묘는 높은 이들의 무덤인 바, 그 앞에는 이 지역이 신성하다는 의미의 사당이 있었고, 솟대와 같이 긴 장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 등을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이 묘도로 마을에서 '북분구묘' 입구까지 놓여 있었다.
'북분구묘'는 사다리꼴의 제단과 같은 봉분이었다. 그 안에 14개의 수장급 옹관이 발굴되었는데 그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이곳이 수장급의 무덤이라는 추론은 발굴 당시 나온 범상치 않은 물품들 때문이다.
세를 과시하는 위세품으로 분류되는 '세형 동검'과 '관옥'이 나왔기 때문이다.
'옹관'은 낯설지 않은 무덤 양식이다. 바로 우리나라 '영산강 주변'의 옛 '마한 일대'에서도 다양한 '옹관'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옹관묘들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국립나주박물관'에서 보았던 옹관들과 이 옹관들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형태와 규모 등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나에게는, '요시노가리'의 옹관은 작고 계란형이다.
먼저 옹관을 묻고 그 뒤에 시신을 안치시킨다. '옹관' 안에는 '동검'이나 '관옥'들을 넣는다. 그런데 재밌는 모습은 '옹관 내부'를 구현한 모습이다. 시신은 무릎을 굽힌 채 웅크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태아가 엄마 자궁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 같다.
죽어서 가는 모습이 태어날 때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이에 비해 '마한의 옹관'은 규모가 훨씬 크다. 모습도 계란형이라기보다 테두리가 보다 완만하고 둥그스레 하다. 편안하다. 달항아리를 보듯 조형적으로 훨씬 격 있는 느낌이다.
마한 시대 '영산강 일대의 옹관'은 '옹관 시대의 절정'을 구가한 듯하다.
'요시노가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해 주는 공간이다.
'가야의 토기'에도 많이 등장하는 고상 가옥 또는 고상 창고.
'김해의 봉황대 유적'에도 고상 가옥이 복원되어 있으나 '요시노가리'는 여기서 더 역사적 상상력을 끌어올려, 그 안에 있었을 법한 제사 토기, 직물들을 구현해내고 있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고증이 이루어진 공간 구성인지는 의구심은 남는다.
(남편은 일본인들이 구현해 놓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의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괴성을 지른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민족주의자(?)인줄은 몰랐다.)
'사가현'이라는 변방의 지역이 외부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지역 개발 차원에서 만든 역사 유적지에 불과한 것일까. 공원 안에 있는 전시실의 전시 구성도 꽉 차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또한 유적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 대한 구비된 책자도 빈약했다.
우리나라에서 늘 벤치마킹 사례로 언급되는 '요시노가리의 실상'이 매우 아쉬웠다.
우리나라는 <역사 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등이 제정되면서 지방에서 고대 역사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 조사하고 발굴, 복원하여 역사적 가치를 조망하고 그 가치를 체계적으로 알리고 지역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역사적 가치를 홍보하고 지역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은 연구, 조사, 발굴이다.
그 토대 위에 홍보하고 지역개발을 할 일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사가의 볕을 쐬고, 사가의 바람을 맞았다.
전시실, 남내곽, 북내곽, 중간마을, 북분구묘를 관람라고 난 후, 순환버스를 타고 빠르게 입구로 이동했다.
1시간 30분. 사가현 간자키시의 3개 마을에 걸쳐 넓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요시노가리 유적' 안에는 순환버스가 한 시간에 두세 대씩 다닌다. 환호취락 입구, 고대 식물관, 북분구묘, 북내곽 아래, 서쪽 출입구를 순환하니, 적절히 활용하면 좋다.
'요시노가리', 걷는 시간이 많은 만큼, 볕이 강하지 않은 오전 일찍 산책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는 게 좋다.
가라쓰 : 불행한 임진왜란의 기억
'요시노가리 유적공원' 근처 <우에스토>에서 점심을 가볍게 하고, 2시경 다음 일정인 가라쓰로 출발했다.
가라쓰는 사가현 북서쪽 끝에 있는 도시다. 이곳은 16세기 토요데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전국의 다이묘들을 모아 오사카성 다음으로 큰 '히젠 나고야성'을 축성했던 곳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무척 가슴 아픈 공간이지만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요시노가리'에서도 자동차로 2시간, 가라쓰에서 오늘의 우리 숙소가 있는 '후쿠오카'까지 가기에도 2~3시간이 소요되는 이번 답사 최고의 대장정이었다.
도착하니 4시다.
'히젠 나고야성'은 성터만 남아있었고 자세한 것은 '히젠 나고야성박물관'(무료 관람)에서 볼 수 있었다.
5시에 폐관하니 서둘러 봐야 했다.
'히젠 나고야성박물관'을 다녀간 많은 한국인들이 '히젠 나고야성박물관'을 조선 침략이라는 임진왜란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성이 담긴 공간으로 평하고 있었다.(한국어 리플릿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그때까지 이어지고 있던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긴 교류를 일시적으로 단절시킨 불행한 사건”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 박물관은 대규모 유적을 보존, 정비하는 사업의 중핵시설이 되는 것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을 통해 양국 간 우호, 교류의 추진 거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불행한 전쟁이라 칭한다. 흔치 않은 역사의식이다.
(남편은 "침략 당사자가 왜 불행한거냐. 침략당한 우리가 불행한거지. 이순신 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하실 일"이라며 또 다시 고함이다. 나는 모르는 사람인 척 했다.)
어떻게 '히젠 나고야성박물관'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다만 이러한 목적 의식이 전시 내용 속에서 구현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그 '불행한 전쟁'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황금다실을 구현해 놓았다.
'불행한 전쟁'을 시작한 이에게 어찌 이리 관대한 것일까. 번쩍번쩍한 황금빛에 '불행한 전쟁'이라는 성찰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문록의 역'이라 부르고, '정유재란'을 '경장의 역'이라 부른다.
이 전쟁이 왜 불행한 전쟁인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반성은 전시관 내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불행이라는 단어만 이 박물관 여기저기 파편처럼,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뿐이다.
오후 5시경 '히젠 나고야성박물관'을 나섰다.
'가라쓰'에서 '후쿠오카'로 돌아오는 길은 무료 도로를 타기로 했다. 빠른 고속도로 대신 대한해협 바다를 옆에 두고 달렸다. 이 바다를 통해 양국은 오고갔다. 곳곳이 교류의 흔적이다.
'히젠 나고야성' 인근 '요부코항'은 바로 건너에 '백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가카라시마'(가당도)가 있다.
우리 역사서가 아닌 <일본서기>이지만, 그 책에 따르면 백제의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 원군을 청하게 되었다. 곤지는 임신한 형의 부인과 함께 가기를 원해서 그 부인이 현해탄을 건너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가는 과정에서 산기가 있어 상륙한 곳이 가카라시마이고 이곳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해안길을 따라 '후쿠오카'로 들어가는 길에 가라쓰의 멋진 '해송 군락'을 보았다.
'가라쓰성'도 차창 편으로 볼 수 있었다. '석양에 물든 대한해협'도 보았다.
이렇게 '후쿠오카 나카스 강변'의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8시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 '가라쓰'에서 '후쿠오카'까지 자동차로 갈 일이 있다면, 고속도로가 아닌 무료 도로를 타시라.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