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한일 고대사 여행기
규슈여행 4일 차, 오늘 밤 한국으로 떠난다.
마지막날은 '후쿠오카'를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후쿠오카'는 영화 <동주>에서도 나왔듯,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가 스물일곱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쿠오카 형무소'의 기억이 진한 곳이다.
그래서 '후쿠오카'를 아무리 돌아다니고 들여다봐도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윤동주' 말고도 '후쿠오카'는 아마도 우리나라와는 많은 역사적 순간을 공유한다.
고대사, 조선시대이건, 대일항쟁기이건. 좋은 기억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건. '후쿠오카'는 고대 역사에서도 대륙 및 한반도의 문화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선진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생산수단과 경제활동을 발전시켜 성장한 도시다.
'후쿠오카시'는 일본의 근대화 물결이 밀려든 1889년 '후쿠오카'와 '하카타'가 하나가 되어 탄생하여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대공습으로 도시는 초토화 되기도 했다.
'후쿠오카'라는 이름은 언제 사용되었을까.
'에도 막부 시대' 이곳을 다스리는 봉건영주로 등장한 가문이 '구로다 가문'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로부터 번을 인수받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새로운 성과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후쿠오카'로 이름 지었다.
우리 호텔은 '나카스'강 인근 '하카타'였다.
오전 10시경 체크아웃을 하고 '하카타'에서 '마이지루' 공원이나 '오호리' 공원이 있는 '텐진'으로 넘어왔다.
옛 '후쿠오카'성 자리에 '마이지루' 공원(舞鶴公園)이 들어섰고, 그 옆은 바로 '오호리' 공원이다. 일본의 성 둘레는 큰 해자가 두르고 있었는데 '오호리' 공원은 큰 호수가 있어 마치 해자 같은 느낌이다. 일산의 호수공원처럼,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후쿠오카' 시민들의 다양한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오호리 공원과 후쿠오카시립미술관
오전 10시 30분경 '후쿠오카시립미술관'에 도착했다. 이곳은 '오호리' 공원 입구, 일본정원 건너편에 들어서 있었다.
1979년에 완공되었다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
건축 설계자는 '마에카와 구니오'.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서구 근대건축을 배운 일본 건축의 거장이라 한다.
무엇보다 이 미술관의 가장 큰 강점은 입지다. 호수를 돌다 바로 미술관으로 입장할 수 있다. 아니면 미술관 야외 카페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차 한 잔 사이에 두고 친구와 수다를 떨 수도 있다.
호수를 돌다 미술관 1층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조각품들이 미술관 야외공간 곳곳에 위치해 있다.
아는 작품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과 기분좋음이 순간순간 밀려온다.
2층 출입구 입구에는 어디서나 눈에 쉽게 띄는 노란색의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1994년작이 있다.
1층 중앙마당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작가 이우환의 심플한 돌 '관계항'이 들어서 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이라도 흔들 뻔한다.
인상적인 작품은 호수에서 1층 미술관 입구로 가다 보면 왼쪽에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은 파란색 입체조각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화가, YBA의 대표작가인 '잉카 쇼니바레 CBE'의 '바람 조각'이다.
여성 작가인 그녀는 태생과 신체적 조건 등이 모두 범상치 않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경험과 자신의 성장배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작품으로 발전시켰다.(그녀는 2018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아프리카 특별전에 초대된 바 있다.)
그녀는 몸 한 쪽이 마비되는 신체장애를 갖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입구 오른쪽 스커트 입은 여성의 엉덩이를 남성이 만지며 서로 포옹하고 있는 남녀의 조각상도 야하지 않은 사랑이 갖는 설레는 순간을 빛나게 포착하고 있었다. 마음에 파문을 내는 포즈에 지나친 발걸음을 돌이켜 사진에 담았다.
1층 소장품 전시실(컬렉션전시실, 고미술)은 '구로다 가문' 전래의 미술, '구로다 가문'의 '보다이지 사찰'인 '도코인의 불상' 등 고미술작품을 공개하고 있었다.
2층은 근현대미술작품으로 구성된 소장품 전시실(컬렉션전시실, 근현대미술)을 운영하고 있다. 고미술부터 근대와 현대미술 작품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상설 전시는 성인 2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기획 전시는 '알폰소 무하'라는 외국 작가의 작품 전시로 관람료는 무려 1,400엔이다.
상설 전시만 보고 기획 전시는 패싱 했다.
상설전시 티켓으로 1층 소장품 전시실과 2층 전시실을 둘러볼 수 있었다.
1층을 관람하고 난 뒤 2층을 보았다.
운이 좋았다.
1층 소장품 전시실에서 '우키요에' 화가 '화첩 삼십육가선'(三十六歌仙)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 대표시인 36명을 그린 화첩이라니. 일본의 문학과 미술을 함께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이 화첩을 그린 화가가 '에도 시대'의 목판화 '우키요에' 화가 '이와사 마타베'(약좌우병위, 1578~1650)다.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를 높게 평가하여 세계 회화사에서도 일찍이 주목받았다.
'이와사 마타베'는 이 우키요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전시는 '이와사 마타베'의 낙관이 있는 <삼십육가선회> '구 우에노가본'과 '약궁본'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화첩 두 종류가 전시되고 있었다.
36명 중 여성 시인이 있을까. 나는 유심히 바라봤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많지 않은 시대, 홀로 걸으며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삶은 기억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많지 않았다. 36명 중 3명 정도.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오노노코마치'(小野小町)다.
그녀는 무엇보다 절세미인이었다 한다.
클레오파트라, 양귀비와 함께 3대 미인이라 일본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림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해서 뒷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한다.
그녀에 관한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한 남성이 그녀에게 구애했는데 그녀는 100일 동안 매일 자신을 만나러 오면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약속대로 매일 그녀를 만나러 오던 남성은 100일째 되는 날 폭설이 내려 그대로 동사했다고 한다.
일본의 '와카시집'인 <백인일수>에도 일제히 폈다가 금세 져버리는 벚꽃의 특성을 허무하게 느껴지는 짧은 인생에 빗대었다는 그녀의 시가 가장 유명하게 전한다.(실제 그녀는 집안이 몰락한 후 노년에는 젊은 시절 미모도 잃고 구걸하며 끼니를 때우는 처지가 되었다 한다. 그래도 과거의 품격은 잃지 않아서 선문답도 완벽하게 해내고 초대받은 연회에서 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고 춤을 추었다 한다.)
花はなの色いろは うつりにけりな いたづらに わが身みよにふる ながめせしまに
(벚꽃 색이 바래 버렸구나, 덧없이, 봄비 내리는 사이에)
2층 전시는 '후쿠오카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미술 소장품 상설전시였다.
상설 전시는 1년 동안 이루어진다 한다. 22년 6월 9일 시작했으니, 올해 6월 8일까지 하는 전시다.
일본 근대 서양화의 천재화가로서 27세에 요절한 '아오키 시게루'(요모츠-히라사가, 1903년작), '마크 샤갈'(Flying Sleigh, 1945년작), '후안 미로'(고딕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를 듣는 무희, 1945년작), '살바도르 달리'(포트 리가트의 성모, 1960년작), '장 폴 바스키야', '마크 로스코'(무제, 1961년작), '앤디 워홀'(앨비스, 1963년작), '아니쉬 카푸어'(Mother as a Void, 1989~90년작), '안셀름 키퍼'(멜랑콜리아, 1989년작)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잉카 소니바레'의 2019년작 <벚꽃을 쏘는 여성> 작품도 좋았다. 전시실 내에서 유일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미술관의 인프라와 시스템, 소장품의 수준도 중요한 내 관심사다. 신소장품 12점이 나와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작년 1년 30점의 소장품이 들어오고 그중 28점이 기증이었다.
구입 소장품의 점수가 미약하다는 것은, 미술관의 재정여력이 넉넉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작품의 기증이 많아 구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궁금한 일이다.
미술관 도서실은 2층 중앙에 그리 넓지않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디지털도서관'과 '과천관'에 있는 '도서관'의 넓고 쾌적한 공간이 떠올랐다.
이곳은 시립미술관이니 도쿄를 갈 수 있다면, 국립미술관의 수준을 비교해 볼 일이다.
'후쿠오카시립미술관'의 정책 중 인상 깊은 것은 전시실에서의 작품보호 정책이다.
전시장에서는 허락된 필기구만 사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져간 3색 볼펜을 사용하려다 제지받았다.
대신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필기구를 사용했다.
작품 훼손에 대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후쿠오카성터'와 '고로칸' 전시관
미술관 관람을 마치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미술관 주차장에 렌트한 자동차, '닛산 마치'(March 24 5)를 주차해 둔 터였다. 차는 그대로 두고, '후쿠오카성터'는 걸어서 둘러보기로 했다.(미술관-후쿠오카성터-방문자센터-고구칸전시관은 거의 3시간이 걸리는 일정으로, 주차료는 시간당 200엔, 일정을 마친 후 정산하니 총 600엔이 나왔다)
호수를 걷다 공원 내 '스타벅스'가 나오면, 이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서 한참을 걸는 일정이다.
'오호리 공원'에서 '후쿠오카성터'가 있는 '마이즈루 공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걷다 보면 시민들이 공원에서 바비큐와 맥주를 즐길 수 있도록 한 BBQ 가든, '구로다 나가마사'가 '나지마성'에서 가져와서 설치한 '나지마 문'을 지나게 된다.
이렇게 20여분 걸어가니 큰 길이 나오고 건너편에 '평화경기장'이 보인다. '동아시아 침략 주범'이라는 역사를 가진 일본이 쓰는 '평화'라는 말은 늘 어색하고, 아이러니 하다.
남편은 이를 두고 "일본인 특유의 간사하고 간악한 혼네와 다테마에"라며 걷는 동안 내내 툴툴거렸다.
'후쿠오카성'의 성주이자 번주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구로다 칸페이'의 아들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제3군 1만 5천 명 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해 '조선의 하삼도'를 유린하며 한양까지 점령했던 인물이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정권'의 '이시다 미츠나리'에 맞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편에 붙은 인물이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자신들만의 영달을 위한 것이며 동아시아를 도탄에 빠뜨리는 자국 중심의 평화다. 일본인들이 쓰는 평화란 단어는 내게 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왜는 늘 간사하여 신의를 지킨 적이 없다."고 하셨던 말씀이 귓가를 계속 맴돈다.
'성터 탐방관'과 '고로칸 전시관' 사이 '후쿠오카 성터'의 문이 나온다. '후쿠오카 성'은 '천수대터'와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곳까지 올라갈 만한 마음은 없었다.
대신, 경기장 옆에 '후쿠오카성터 탐방관'(무료, 후쿠오카성터 방문자센터)을 들렀다.
전시관이라기보다 안내센터와 같은 조그만 건물. '후쿠오카성터 탐방관'에서는 이곳 '후쿠오카성'을 축성한 '구로다 나가마사'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인 '구로다 칸페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은 후 노년에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물려줬다는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일본도'가 전시품의 중심이었다.
한글자막이 제공되는 14분짜리 영상이 흘러나온다. '후쿠오카성의 역사와 구조'가 잘 설명되었다.
당시 동아시아 역사의 맥락을 고려하며, 자막을 새기며 들어야 한다.
일본열도 내의 중심이 '규슈'에서 본토로 옮겨갔을 즈음, '후쿠오카'는 외교 및 통상 창구이자 일본 방어의 최전선으로 역할을 했다.
7세기말 하카타만에 연해 있는 이곳에는 외교사절이 머무르는 영빈관 '고로칸'(홍로관)이 있었다.
외부세계와 만나는 관문이었다. 그런데 1987년 평화경기장 일대에서 '고로칸 유적'이 발견되었다.
당시 견당사를 비롯한 고대의 국제교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평화경기장 옆에는 고로칸이 발굴된 당시를 보존하여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고로칸 전시관'(무료)이 있다.
후쿠오카시립박물관: 한반도에서의 문화 유입을 인정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후쿠오카시'에서 운영하는 '후쿠오카시립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1989년 '후쿠오카'에서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 박람회' 때 탄생한 '시사이드 모모치 지구'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 고대사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인 '니시진마치 유적'이 발굴된 곳에서 멀지 않다.
박물관 관람객에게 무료로 주차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장점이다.
박물관 입구는 거대한 조각상이 방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이곳도 상설전과 기획전으로 운영되고 있고, 박물관의 상설전은 대외교류의 창구였던 '후쿠오카시'의 역사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테마로 운영되고 있다.
중요 기획전은 1,400엔을 내고 입장해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200엔 하는 상설전 티켓을 구입하면, 고고학의 성과와 한계, 토기의 두근두근 매력포인트를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기획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이곳 '후쿠오카시 박물관'이 자랑하는 유물은 '중국 후한서'에 등장하는 '광무제'로부터 국가로서 처음 인정받아 하사 받은 금 도장이다. 상설전 입구에 단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고 있었다.
일본 열도에서 국가의 등장을 증명해 줄 이 유물이 발견된 것은 1784년이다.
'후쿠오카' 앞바다의 '시카노섬'에 묻혀 있던 것이 발견되었고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1931년 일본 국보로 지정 되었으며 당시의 교류를 증명하는 중요 자료로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유명한 문화재가 되었다.
금도장의 이야기부터 시작된 테마는 11개의 작은 테마로 '후쿠오카'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의 여명기, 국가의 시대, '고로칸'의 시대, '하카타 중국 무역상'의 시대, '하카타 거상'의 시대, '후쿠오카 번'의 시대, '근대 도시로서의 후쿠오카' 시대, '현대의 후쿠오카' 시대, '후쿠오카'의 인생, 지역대표 축제인 '야마카사의 시대'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었다. 참고로 일본역사는 조몬, 야요이(기원전~기원후 3세기 초), 고훈(3세기 중반~6세기 초), 아스카(6세기 초~8세기초), 나라(8세기 중반~8세기 말), 헤이안(9세기~12세기 말), 막부(가마쿠라 시대 12세기 말~14세기 초, 난보쿠초 시대 14세기 초~14세기말, 무라마치 시대 15세기초~15세기말, 센코쿠시대 15세기 말~16세기 말, 에도 시대17세기~19세기 중반), 메이지(19세기 후반~20세기 초), 타이쇼(20세기 초~20세기 중반), 쇼와(20세기 중반~20세기 후반), 헤이세이(20세기 후반~현재)로 이어졌다고 '후쿠오카시립박물관의 연표'는 설명하고 있다. '아스카 시대' 중심지는 592년부터 나라였고, '헤이안 시대' 중심지는 794년부터 교토였으며(무로마치 막부 시대 중심지도 1338년부터 교토이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 중심지는 1185년부터 가마쿠라였고, '에도 막부' 시대 중심지는 1603년부터 도쿄였다. 일본 역사의 중심지는 규슈가 있는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계속적인 동진이었다.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유입에 대한 언급은 여명기와 국가의 시대 테마에서 주로 언급되어 있었다.
빙하기에는 지금의 동해는 대부분 육지였기에 대륙으로부터 사람들이 건너와 이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약 1만 5천 년 전 바다로 인해 대륙과 분리되어 섬이 되었다.
사람들은 토기를 사용해 재료를 조리했고, 활을 제작해 사냥하며 살았다.
석기, 토기 등 도구들은 이곳의 문화가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었음을 잘 알 수 있게 되어있다.
한반도에서 전파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벼농사 재배기술이다. 그 재배기술을 통해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마을이 국가로 성장했고, 지배자들이 등장한다. 이 지배자들은 그 권력을 자랑하듯 청동기나 관옥을 무덤에 함께 묻었고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권력을 강화했다.
영산강 일대에서 출토된 옹관과는 규모와 형태는 다르지만 서로 가깝게 유사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일본의 고훈시대, 4세기에서 6세기 사이로 추정되는 '니시진마치'에서 나온 토기였다. 짧은 목의 토기로 타날기법으로 장식된 영산강가의 조족문 토기와 비슷했다.
고훈시대 등장한 영산강 남쪽에서 간혹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의 등장도 설명되고 있었다.
벼농사기술의 전래, 부뚜막과 시루의 존재, 옹관무덤의 존재, 전방후원분의 등장, 조족문토기의 모습은 그 시대 한반도 남부(마한, 가야 등)와 규슈는 교류가 빈번했던 곳임을 알게 하는 유물들이었다.
기획 전시실은 토기를 재미있는 시각에서 관람객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토기는 고대에 가장 많이 남겨진 물건이다. 그 토기들이 그 시대 기술과 문화의 관점에서 시대와 장소를 나눌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물건이다. 그 시대와 형태의 특징은 전문가들은 '편년과 양식'이라 부른다. 자신들의 언어로 '편년과 양식'을 설명하다 보니, 일반인들은 지루해진다. 이곳 두근두근 포인트라는 말랑말랑한 테마로 토기를 일반인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었다.
토기의 무늬를 만들 때 쓰는 도구, 검게 탄 흔적을 이해하는 방법, 토기의 입구가 작은 경우의 용도 등 토기를 볼 때 우리들이 한번 즈음 품어 봤을 질문들에 일본의 박물관 종사자들은 성실히 답하고 있었다.
기록으로 남기는 이야기들이 역사가 된다
일본은 섬나라다.
과거, 일본인들이 '카미카제'(신풍)라고 이름한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나버린 몽골의 침략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 도쿄에 맥아더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일 이외에는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는 나라이다.
과거의 것들이 소실되거나 없어질 일이 없었다.
반면, 중국과 일본의 침략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병탄된 우리나라는 문화적 자산을 너무나 많이 잃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 문물을 일찍 받아들였다. 1900년대 초부터 근대 학문이 시작되었다.
1900년대 초부터 역사학과 고고학이 시작되어 자국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연구를 시작. 다량, 다수의 결과물들을 축적한 나라이다.
'후쿠오카 성터'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 '고쿠칸 유적'을 발견하여 발굴의 현장을 전시관으로 만든 일,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발견하고, 기록하고 또 남기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발굴하고 엮어내어 의식적으로 기록해 가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역사탐구는 아쉽게도 '적극적인 문화재의 발굴과 활용을 통한 역사 연구 패러다임' 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알아내고 그것을 이야기로 후대에 남기는 일은 우리 시대가 해야 할 일이다.
양질 전환의 원칙, 양이 변해 질이 된다.
더 많이 발굴하고, 더 많이 연구하고, 자그마한 일도 이야기로 만들어 남기는 일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