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독일어
나의 독일어는 변변치 않다.
한국에서 학원 다니며, B1 가까스로 붙은 실력이다.
독일행 프로젝트가 꽝 난 다음, 이렇듯 공부머리에 비해 언어머리가 발달하지 않은 나는 고민을 했다.
독일어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해.
직장인으로 시간도 없고 독일어를 쓸 만한 일도 없는데.
취미 삼아 독일어를 한다면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데 써야 할 시간과 돈을 독일어와 나눠 써야 하는 거니까.
결정의 기준은 '마음이 원하는가‘, ‘재미가 있는가'였다.
독일어 책을 찾고 넷플렉스 독일 드라마를 찾고 있었다.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하기 싫어지면 그때는 가차 없이 독일어를 떠날 거다.
캐릭터가 살아있는 학습용 드라마, 니코스 벡
그렇게 올해 4월 니코스 벡(Nicos Weg)을 만났다.
독일어 선생님이 듣기가 취약한 내게 니코스 벡을 권했다.
(독일어 선생님과 줌으로 하는 일주일 1시간 독일어, 일주일에 한 번 가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Die Verwandlung) 원서 강독도 애정한다.)
니코스벡은 독일어 학습자들에게 꽤 알려진 드라마다.
공영방송 도이치벨레에서 독일어학습용으로 만들었다.
니코(Nico)라는 스페인 청년이 법학을 공부하길 원하는 부모님으로부터 탈출, 독일로 와서 독일사람들을 만나고 정착하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A1, A2, B1로 학습단계별로 콘텐츠가 있다.
독일의 생활문화, 독일의 시스템 등에 대해 학습단계에 맞춰 대화를 구성했다.
랩탑뿐 아니라 모바일로도 볼 수 있다.
어디에서든 독일어를 배울 수 있다.
맘만 먹으면 말이다.
단계별로 18개 작은 테마로 이루어졌다.
A1은 일상을 다루는데 직장생활(Arbeitsleben), 음식과 여유(Essen und Freizeit), 날씨와 휴가(Wetter und Urlaub), 옷(Kleidung), 건강(Gesundheit) 등의 주제가 있다.
A2는 돈(Geld), 가족(Familie), 디지털 생활(Digitales Leben), 사람 만나기(Leute treffen), 식당(Im Restaurnat) 등이다.
B1는 좀 더 난이도가 높다. 역사(Geschichte), 여성과 남성(Manner und Frauen), 기후(Klima), 환경(Umwelt), 정치(Politik), 이민(Migration) 등 최근 사회에서 이슈로 다루지는 주제들이다.
테마별로 단어(Wortschatz), 문법(Grammatik), 스크립트(Manuskript), 연습문제(Übungen)가 있다.
테마에 따라 Landeskunde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지역연구'이다.
독일 사회와 그 문화를 알려주는 코너인데, 나는 이 코너를 많이 애정한다.
예를 들어 <무엇을 마실 거니?(Was Trinkst du?)>라는 소주제가 있다면, Landeskunde로 독일의 맥주(Das Bier, bitte)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18세 이상이 살 수 있고 혈중 알코올농도가 0.05 퍼센트 이상이라면 운전할 수 없다는 팁도 준다.)
독일어 미디어 환경, 독일 통일, 독일의 선거시스템 등 방구석에서도 독일사회를 알 수 있다.
Nicos Weg A1: https://learngerman.dw.com/de/anf%C3%A4nger/c-36519687
Nicos Weg A2: https://learngerman.dw.com/de/anf%C3%A4nger-mit-vorkenntnissen/c-36519709
Nicos Weg B1: https://learngerman.dw.com/de/fortgeschrittene/c-36519718
나의 독일어 프렌즈(Friends), 니코스 벡!
학습용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는 게 니코스벡의 장점이다.
드라마로서의 재미가 있다면 우선 학습이 지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니코가 독일에 정착하기까지 만나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미국의 유명한 시트콤 드라마 <프렌즈(Friends)>의 친구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 친구들도 독일사회에서 있을 법한 인물들을 대표한다.
여자친구 셀마(Selma) 가족은 시리아에서 온 난민으로 독일에 정착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혼자 사는 할머니 잉에(Inge)는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넘어온 이민자다.
니코가 다니는 식당 마렉(Marek)은 은행원 출신 막스(Max)와 엔지니어 출신 타렉(Tarek)이 꽉 짜인 조직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시작하여 10년을 운영해 온 곳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든다.
니코와 잉에는 이곳에서 쉼을 얻고 독일사회로, 그리고 외로운 세상을 헤쳐갈 온기와 용기를 얻는다.
독일판 카모메 식당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술집, 정희네 같은 곳이다.
(언젠가 드라마평으로 쓰고 싶을 정도의 캐릭터들이다)
인물에 대해 작가가 갖는 관점도 좋다.
스페인에서 온 니코는 부모와의 갈등을 피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독일에 왔다.
법학을 공부하기 싫어하는 니코와 니코가 법학을 공부하길 바라는 부모.
한국이나 스페인이니 자식이 법학 등 선호되는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갖기를 원하는 부모 마음은 똑같나 보다.
셀마는 전쟁을 피해온 시리아 난민의 딸이다.
2015, 2016년 걸쳐 시리아 등 100만 명 이상 난민을 받아들이며 앙겔라 메르켈이 했던 "우리는 해낼 수 있다(Wir schaffen das.)"의 정신이 이렇게 드라마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건가.
그녀의 아버지 에브라힘(Ebrahim)은 시리아에서 비뇨기과 의사로 살아왔는데, 독일에 와서 체류허가증을 받을 수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식당의 잡일로 딸과 부인을 부양하고 있다.
난민들이 독일사회에 정착하기까지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셀마 가족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물론 셀마의 부모는 시리아의 전통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어, 셀마가 니코를 만나는 것을 반대하여 이들 사랑의 방해꾼이 된다.)
니코를 돕는 여성들이 있다.
공항에서 가방을 잃고 헤매는 니코를 만난 인연으로 니코의 독일 정착을 돕는 여성, 리자(Lisa).
정규직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독일어, 영어 등을 가르치는 그녀는 늘 바쁘다.
그럼에도 남친과 헤어졌는데 아이를 갖게 되어 낳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니나(Nina)를 응원하고 병원에 늘 함께가 주는 따뜻한 여성이다.
그리고 니코의 숙모 야라(Yara)가 있다.
진취적 여성관과 환경친화적 생각을 갖고 있는 그녀는 조카 니코와 페페가 힘들 때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덥석 손잡아 주는 츤데레 캐릭터다.
이렇듯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의 박해영 작가도 아닌데,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마치 그러한 드라마 속의 또 다른 정희, 염미정, 염창희, 지현아 같이 친근하다.
가보자, 한 발, 한 발...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4월부터 니코스 벡을 듣기 시작했다.
언어는 무엇보다 루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아침 출근 전 30분씩 듣는 것을 루틴으로 만들고자 했다.
저녁약속이 많아 매일 아침 루틴 실행은 쉽지 않다.
일주일에 반타작 정도의 승률이다.
그렇게 4월 A1, 5월 A2를 마치고 지금 B1를 보고 있다.
유튜브의 니코스 벡 콘텐츠를 활용하고 있다.
'Deutsch lernen: Ganzer Film auf Deutsch'로 1시간 50여분 A1, A2, B1 풀영상이 올라와 있다.
4년 전 업로드되었는데 조회수 2230만 회, 1061만 회, 650만 회를 기록하는 핫한 영상들이다.
한 편씩 한 달 동안 본다는 계획이다.
110분 분량을 한 달 25일로 셈했을 때, 하루에 약 4.4분 드라마 분량을 익히면 된다.
막상 문장들 익히다 보면 30분 동안 4.4분 소화하기도 벅찰 때가 많다.
유튜브를 선택한 것은 드라마 흐름이 끊기지 않아서다.
공부가 아닌 즐긴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단어나 독일사회가 궁금하면 모바일앱을 활용한다.
단어를 다 알아도 해석이 용이치 않을 때가 있다.
그때는 캡처화면을 텍스트화, 한국어로 번역’해주는 어플디플(Deepl)을 활용하고 있다.
낑낑 대지 말고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자.
맥락을 해석하는 이 녀석은 정확도가 높아 믿음직하다.
암기는 내게 쥐약이다.
암기를 위한 암기는 진짜 내게 재미없는 행위다.
대사의 문장 구조를 익히고, 중요한 대사는 서너 번 정도 쉐도잉을 하듯 따라 읽는 수준으로 타협했다.
따라 읽다 보면 입 주위 근육이 기억하리라 희망해 본다.
드라마틱한 변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독일어 쓰기, 말하기가 조금은 편해지고 있다.
다중 언어 가능자(Polyglot)인 리디아 마코바(Lydia Machova)의 테드 강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방법(The Secret of learning a new language)>을 흥미롭게 들은 적 있다.
그녀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네 가지 요소로 재미, 방법, 시스템, 인내심을 이야기했다.
여러 다중 언어 가능자를 만난 결과, 그들마다 방식이 달랐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언어 공부법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즐길(enjoyment) 수 있는 방법(method)으로 언어를 배워야 하고, 일상 속 실천으로 시스템이 되어야 하고(system), 언어를 익히기까지 (통상은 2년 동안) 인내할 수 있어야(patience) 한다 했다.
TED, The Secrets of learning a new language
그녀는 자신이 너무도 좋아하는 드라마 <프렌즈>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녀에게 <프렌즈>가 타언어로 가는 비상구가 되었듯, <니코스 벡>이 내 독일어로 가는 비상구이지 않을까.
6월까지 B1를 마칠 생각이다
B1를 마친 후 다시 A1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니코의 희망과 사랑을 열렬히 응원하는 나,
니코가 어려움을 뚫고 독일사회에 정착해 가는 것, 그것은내가 독일어에 친숙해지는 과정이리라.
그날이 오면...
앙겔라 메르켈을 만나면 독일어로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을 던져, 사려 깊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