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수빈 May 02. 2024

연경이 마음

'그때 넌 내게 왜 그랬을까?'

  연경이(가명)를 알게 된 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통통한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거리는 머리를 가진, 쾌활한 척하지만 어딘가 소심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같은 반 아이. 학기 초에는 연경이와 그다지 접점이 없었고, 나는 친하게 어울려 다니는 무리가 따로 있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영영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로 남을 뻔했다.


  그러던 어느 날, 3학년 진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놀고 있던 내게 다가온 연경이가 호쾌하지만 조금은 어색한 톤으로 “야, 전수빈이 완전 대장이네!” 하고 장난을 걸어왔다. 평소 말 한 번 제대로 안 섞어 본 녀석의 갑작스러운 친한 척이 조금 민망했던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우리 사이에 어떤 벽이 허물어진 것은 분명했고, 나와 연경이는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된 나는 운이 좋게도 연경이와 같은 반이 되었고, 2학년을 함께 떠들썩하게 보냈던 친구들과 흩어져야 했던 내게 그 사실은 매우 큰 안도감을 주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덜고, 연경이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배신감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과 헤어진 나와 달리, 연경이는 3학년이 되면서 전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같은 반에서 재회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연경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급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친하던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따돌리는 행동이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이었다.


  연경이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내가 끼어들려 하면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거나, 은연중에 나를 무시하는 말을 농담인 척 던지기 일쑤였으니, 나 역시 연경이를 편하게 대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멀찌감치 떨어져 ‘혹시 내가 연경이에게 무슨 실수를 한 게 아닐까’ 고민하며 홀로 속을 썩여야만 했다.

  “니 갑자기 내한테 왜 그라는데?” 그렇게 툭 터놓고 물어봤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그러나 이성적인 해결책을 먼저 고민하기엔, 우리는 너무 감정적이고 쉽게 불붙는 나이였던 것 같다.


  그 불길이 그나마 희미하게 붙잡고 있던 이성을 삼켜버린 건 조만간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를 대놓고 밀어내는 연경이에게 그간 쌓여 있던 감정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나는 분노에 차 욕설을 퍼부었고, 기세가 한풀 꺾인 연경이를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이 으르렁거리던 나는 곁에 있던 아이들의 만류에 겨우 돌아섰다.

  그날 이후로는 내가 먼저 연경이에게 화해를 청하는 일도, 연경이가 먼저 내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그렇게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로 어영부영 돌아갔고, 졸업 후 다시는 연경이를 만나지 못했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을 보고 연경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극 중 ‘선’과 ‘지아’가 만나 서로 친해지고, 언어로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 이유로 멀어지는 과정이 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 시절엔 학교라는 세계 안에서 유지되는 우정과, 물리적 힘으로 구분되는 위계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진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막막한 사건이었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다른 친구 무리에 스며들기 시작한 지아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선이를 보며, 연경이가 내게 등을 돌렸을 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오버랩 되었다.


  <우리들>을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며, 문득 그 당시의 연경이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연경이는 과연 왜 그랬던 걸까?

  2학년 때 다른 친구들과 명랑하게 어울리는 내 모습을 동경했던 연경이는 나와 친해지기로 마음먹었지만, 3학년이 되어 친구들이 더 많아지고 보니 자신 말고는 친구로서 의지할 데 없는 내가 괜히 초라해 보이고 싫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그 모습이 2학년 때 자신의 모습 같아서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늦게나마 사건의 인과관계를 상상해 보지만, 어쩐지 시나리오를 쓰던 버릇으로 끼워 맞춘 편의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 같다. 결국 본인에게 직접 대답을 듣지 않는 이상 그 이유를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연경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만남이 서로에게 불쾌한 마주침이 아니라면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다. 혹시, 그때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겠냐고. 그런데 왠지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경이는 아마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그 이유가 너무 하찮은 나머지 말하기가 민망해서든, 아니면 이미 기억마저 흐릿한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든.


  과거에 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려 봤을 때, 문득 ‘그땐 내가 왜 그랬지?’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그 시절 연경이의 행동이 뭐 그리 가슴 졸일 일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깟 친구 하나 잃는다고 해서 세계에 균열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 보면 이제 와서 새삼 연경이의 마음을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답을 알 필요는 없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

   ‘그냥... 그러고 싶었나 보지, 뭐.’ 그렇게 잠깐 그 시절의 나와 연경이의 미숙한 마음을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쁜 감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