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잘하고 싶었다는 변명
한창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2015년, 학교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장편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단편 하나 만드는 것도 쩔쩔매는 마당에 무슨 장편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너 아니면 누가 장편 하겠냐’는 주위의 부추김과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장편영화를 만들어 보겠나 싶은 생각에 부랴부랴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졸업 후 단편영화는 물론이고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를 놓친다면 정말이지 평생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그득그득 쌓여 갔다.
그렇게 몇 달 후 완성된 시나리오의 제목은 <선이>. 호구 같은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괴롭힘 당해 온 영화과 재학생 ‘선이’가 미스터리한 편입생 ‘덕희’를 만나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야기였다. <선이>를 찍는 데 지원받은 제작비는 약 4천만 원. 단편영화를 두 편쯤 찍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제작비로 장편영화를 찍게 된 것이다. ‘학교 작품’이라는 이해관계가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기획. 모든 스태프들이 순전히 장편영화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는 명목으로 무보수 참여를 감행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졸업 작품을 찍던 때, 첫날 촬영을 마친 뒤 한 스태프로부터 ‘감독님이 보다 강하게 현장을 휘어잡으셔야 할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다소 풀어진 분위기에 스태프들이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만큼 딜레이가 생기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보다 명확한 연출과 현장 지휘로 모두가 촬영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길 바란다는 게 그 말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잘못 해석한 나는 스태프들이 흐트러진 기미가 보일 때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 레디!!” 놀랍게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농담을 주고받던 스태프들이 바짝 긴장한 채 촬영에 집중하는 광경을 보자니 ‘아,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촬영이 끝난 후, 메인 스태프들이 남아 회의하는 자리에서 전날 내게 피드백을 줬던 스태프가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 오늘 좋았어요.” 기분이 으쓱해진 나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촬영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때면 한껏 목청을 높여 외쳤다. “아, 레디...!!”
문제는 그때 생긴 버릇을 장편영화 촬영 현장까지 안고 온 거였다. 2016년 1월, 촬영 첫날부터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날씨가 따뜻하기로 유명한 부산임에도 불구하고 장갑 없이는 손이 깨질 듯 시린 날들이었다. 꽤 많은 촬영 분량에 반해 주어진 일정은 겨우 14회차 남짓했다. 촬영으로 인해 숙소가 아닌 현장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이어지고, 턱없이 부족한 수면과 혹독한 추위는 스태프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게다가 강추위 때문에 카메라가 작동을 멈추고, 모니터 화면이 깨지는 등 그러지 않아도 지연되던 촬영을 더욱 발목 잡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첫 장편영화 연출인 만큼 정말 잘해내고 싶은 욕심이 그득했다. 그러다 보니 실수로 촬영에 필요한 중요 의상을 준비하지 못한 연출부와 미술부에게 짜증을 내고, 촬영 도중 웃음이 터져버린 촬영부에게 화가 나 현장을 박차고 일어나고, 돌발 상황의 연속에 잠시 촬영장을 떠나 몰래 울고 돌아오는 등 현장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 밖에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한 나의 수많은 잘못들이 스태프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을 것이다.
고생한 만큼 정당한 보수를 지급받는 작업도 아니고, 순전히 좋은 경험을 쌓기 위해 나를 도와주는 스태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여느 영화나 드라마 속 가해자들의 비겁한 변명처럼,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이 한 작품의 감독으로서 현장을 휘어잡고 굴러가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카리스마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내가 어떤 착각에 빠져 있었건, 앞서 글에서 어떠한 핑계를 남겼건 두말할 것 없이 모두가 나의 잘못이었다. 그저 내가 그만큼 나쁜 감독이고, 미숙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고작 스물여섯 살의 평범한 영화과 졸업생이 무슨 내공으로 그럴듯한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친 <선이>는 완성 이후에도 그 어떤 영화제 및 상영회에서도 공개되지 못한 채 외장하드 속에 고이 잠들었다. 약 2주 간 지새운 밤과 살을 파고드는 추위, 온갖 스트레스와 짜증, 모멸, 눈물, 그 속에서도 종종 기적처럼 피어났던 웃음. 그 모든 것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선이>는 내게 ‘너 그따위로 살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일러 준 4천만 원짜리 수업이 된 셈이다.
가끔 <선이>를 함께했던 동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때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전히 다음 작품을 함께하며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마치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다를 떨다 보면, 문득 이들이 차라리 내 뺨이라도 한 대 시원하게 갈겨 줬으면 싶다. 내가 밉지 않을까. 다들 그런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나를 좋은 마음으로 대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 이 마음의 짐은 적어도 귀싸대기가 현실화될 때까지는 안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동료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내게 <선이>를 언제 공개할 거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면 난 그저 머쓱한 웃음을 머금고서 입을 꾹 다문다. 영화의 미흡한 완성도가 창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김없이 소환되는 부끄러운 기억이 죄책감을 동반하는 탓에 더욱 그렇다.
언젠가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할 날이 올까? 개차반이었던 과거와 그때의 미숙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어쩌면, 언젠가 이 영화를 공개하는 것이 진정 그 시절의 나를 견뎌야 했던 동료들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