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뭐 별거 없구만
서울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얼마 뒤, 어머니와 외식을 하던 중 문득 이런 내 결심을 말씀드렸다. 다 큰 아들이 서울에서 혼자 살 거라는 게 뭐가 그리 걱정이셨는지, 어머니는 웬만하면 독립을 하더라도 부산에 집을 구해 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며 대뜸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서울 애들하고 경쟁해서 먹고 살 수 있겠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호기롭게 ‘못 할 게 뭐가 있냐’고 답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해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표현을 어머니식대로 한 것이었겠지만, 솔직히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고, 괜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서울 애들’이 뭐 별거라고... 나는 보란 듯이 잘 적응해서 살겠다는 오기로 남은 음식을 싹 비웠다.
전에 면접을 본 두 군데 회사 중 첫 번째 회사에 입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면접 전에 살펴본 회사 포트폴리오의 수준이나 대표님의 태도로 짐작해 보건데, 이곳에서 배울 것이 더 많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출근하기로 약속한 날까지 약 2주의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 안에 앞으로 내가 살아갈 집을 구해야 했다.
역삼역 부근에 있는 회사까지 출퇴근이 용이하도록 2호선 근방의 집을 알아보기로 한 나는 곧바로 서울에 올라가 신대방삼거리에 위치한 부동산을 찾았다. 한동안 ‘다방’, ‘직방’ 등 부동산 앱을 통해 매물을 훑어보며 독립생활의 환상을 부풀려왔는데, 공인중개사와 함께 방문한 첫 집에 발을 딛는 순간 그 환상은 보기 좋게 박살났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고양이 묵은내, 싱크대 위에 눌어붙은 프라이팬, 바닥을 굴러다니는 맥주병, 그밖에 온갖 쓰레기와 검은 때까지, 일일이 묘사하기도 숨찬 4평(도 안 될 것 같은) 원룸의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입자와 공인중개사는 서로 민망한 얼굴로 ‘지금은 이래 보여도 치우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특수청소부를 부르지 않는 한 가망이 없을 것 같은 그곳을 둘러보며 나는 왜인지 세입자에게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찌 본인이 사는 공간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사느냐고. 사람이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거냐고.
악몽 같은 그곳에서 빠져나와 다음, 그 다음 집으로 넘어갈수록 공간의 컨디션은 점차 나아졌다. 그러면서 서울에서는 얼마의 돈으로 얼마만큼의 공간을 허락받을 수 있는지, 그래서 나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보라매부터 서울대입구역 근방까지 오가며 총 열두 군데의 집을 돌아보았고, 다행히 그중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월세 계약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시간을 보냈다. 곧 이곳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니 평범한 모습으로 자리했던 주변의 풍경들이 새삼 새롭고 애틋해지는 기분이었다. 심드렁했던 벚꽃이 핀 우리 동네 모습도 유달리 아름다워 보이는데, 하기야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가까이 있을 때는 때로 밉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던 그들이, 이제 곧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벌써 그립고 아쉬운 마음. 그렇다고 그게 또 못 견디게 섭섭하지도 않은, 적당한 감상에 잠겨 그 모든 것들을 두 눈에 담았다.
이삿날에는 새벽부터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원래는 혼자 올라가서 집 계약과 이사까지 마칠 계획이었지만, 그러기엔 이삿짐이 애매하게 많은 데다 ‘아들이 살 집인데 한 번은 가 봐야 된다’며 두 분이 함께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와 내가 번갈아 운전하며 도착한 서울에서 정신없이 집 계약을 마친 뒤, 근처 초밥집에서 점심을 먹고서 부모님과 헤어졌다. 서울의 어느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그렇게 한동안 바라보았다.
곧바로 동사무소에 들러 전입신고를 마친 나는 그날부로 공식적인 서울 시민이 되었다. 며칠 동안은 ‘오늘의 집’에서 미리 새집으로 주문해 둔 가구나 물건들을 정리하고 집을 꾸미는 재미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꼴에 원룸 인테리어 관련 유튜브 영상을 좀 찾아봤더니 사고 싶은 게 어찌나 많던지. 나의 실내 동선과 취향, 실용성 등을 적당히 고려해 작은 공간을 착착 꾸려 봤더니, 텅 비어 있던 집이 어느새 사람 사는 공간처럼 보였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렇게 삼사 일 지내다 보니 자꾸만 필요한 물건이 더 생겼다. 사람 하나 사는 데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니. 더 이상 나를 미니멀리스트라 부르지 않으리라.
집 정리를 끝내고 나니 여유가 생겨 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전시도 보고, 더현대 서울도 구경했다. 이름에 ‘서울’이 붙은 큼지막한 장소들을 연달아 보다 보니 ‘과연 내가 서울에 왔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매 주말마다 서울의 풍족한 문화생활을 만끽하는 부지런한 도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마음이 과연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전시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둘러 모여 뭔가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관객들이 사방에서 팽팽하게 줄을 끌어당기고, 그 힘으로 세운 기다란 봉 위에 누군가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공연자는 그 봉을 타고 오르내리고, 오직 두 팔로 매달려 몸을 가로로 누이는 등 절로 경외심이 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사람들의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오고, 어느새 공연은 마지막 순서를 앞두고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좋은 직장 들어갈 때, 저는 이 거리가 좋아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 공연을 해 왔습니다.”
조금은 비장한 얼굴로 말을 마친 공연자는 과연 피날레답게 머리털이 쭈뼛 서는 위험한 묘기를 보여주었다. 산다는 건 이따금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감히 짐작하자면 ‘그런 건 취미로 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라’는 세상의 부추김을 거부하고 공연을 해왔을 저 공연자의 말이, 나름대로 용기를 내 서울 생활에 도전한 나와 공명하며 큰 울림을 주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많은 걱정이 앞섰다. 적응을 못하진 않을까, 내 능력이 업무 수준을 못 따라가진 않을까, 맞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진 않을까. 하지만 모든 게 기우였다. 얼마 동안은 낯설기만 했던 서울과 새로운 직장에서의 생활도 빠르게 적응했고, 업무적으로 뒤떨어지는 일도 없었으며, 때로 상극인 사람들과 부대끼더라도 견딜 만했다. ‘역시 서울 애들 별거 없구만.’ 이곳에서 산 지 1년 차, 아직까지 서울은 내게 신기하고 재밌는 게 많은 도시다. 함께 영화를 작업했던 애정하는 사람들을 보다 자주 만날 수 있고, 가끔씩 공연을 보고 나서도 몇 시간 걸려 돌아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좁지만 내가 좋아하는 섬유유연제 향이 둥실 떠다니는 집이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또 얼마간 살아갈 것이다. 이만하면 서울상경대작전은 대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