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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호 Jun 12. 2024

무어라도 쓰려고 한다

무어라도 쓰려고 한다

2024.6.11



내 책상 위에는 하늘색 타임타이머가 놓여 있다.

그것의 중심 바늘을 잡고 끝까지 돌려 주면 딱 1시간이 설정된다.

앞으로 매일 1시간 동안 필요하다면 그 이상

무어라도 쓰려고 한다.

단, 무어는 시가 아니었으면 한다.

무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편하게 쓰고 싶을 뿐이다.

어떤 글이 나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는 시와 무어가 닮아 있는 것도 같은데

시가 아니었으면 한다.

시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쓴다.

쓰자!


처음 쓰는 김에 조금만 더 써 보려고 한다.

사실 타임타이머의 붉은 면적이 한참이나 남아 있다.

조금만 더 쓰는 김에 나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나는 시를 좋아하는 20학번 대학생이다.

전공은 식품공학(정확히는 식품생명영양학과,인데 줄여서 식공이라 말하고 다님.)이다.

다시 말해서 시를 좋아한다. 하지만 식품공학 전공을 한다.

하지만,은 생략 돼도 좋겠다. 시를 좋아하는 것과 식품공학을 전공하는 것 간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으니까.

알려진 대로 20학번은 코로나 학번이고 약 2년 동안 나는 학교가 아닌 집에서 화상 수업을 들었었다.

또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래서 더 궁금했던 대학 생활이었는데

조금 많이 허무했다. 무엇보다 심심했다.

당시 나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타지에 자취방을 구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고 매일같이 자취방 침대에서 자취방 책상 앞으로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화상 수업이 끝나고 나면 매일같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온다. 

그때부터 자취방은 시간과 허무의 방이 된다.

나는 지루한 것을 좀처럼 견디질 못하는 사람이다.

놀 친구는 없다.

그래서 침대 곁으로 책상을 끌어와 밀착시키고는

유일한 빛, 노트북으로 

무어라도 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이 왜 글이었는지는 이젠 모르게 되었고

다만 글이어야만 했던 것 같다.

매일 공모전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여러 종류의 공모전 중에서 갓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의 능력으로는

그 무엇도 쉽지 않아 보였다.

팀원 위주의 공모전이 대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무슨무슨 네이밍 공모전을 발견하게 되었던가.

네이밍, 즉 이름 짓기라면 손쉽게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정말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수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낼 수 있는 네이밍 공모전은 다 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찾아오는 심심과 지루함의 방.

이제 뭘 할까, 마우스 휠을 도륵도륵 굴리다가

무슨무슨 수기 공모전을 봤던 것 같다.

수기는 단 1분이면 끝을 보는 네이밍 공모전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라는 판단도 들었다.

돌고돌아, 그래서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수기는 경험도 하지 않은 가짜 수기를 쓰다가 스스로 질려 버려

포기하였다. 대신 한글 프로그램 빈 문서에다

뭐라도 쓰기 시작했다.

긴 글을 쓰지 못하겠어서 짧은 글을 썼다.

주제 없었고 할말 없었다.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글을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그게 왜 시 쓰기로 연결되었는지는 이젠 모르게 되었다.

여기부터 진짜 생각이 안 나는 구간에 접어드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어쨌든 결론이자 서두를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어찌어찌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글쓰기 플랫폼이었다.

내가 쓴 글을 거기에 올려 보려 했는데

작가 등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작가. 작가.

그, 엄청 멋진데?

아무나 글을 쓰지 못 한다는 사이트의 특성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작가란 특별한 것 같아 보였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려고

글을 썼다.

어찌저찌 8번인가 9번 만에 공식으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나 그때 엄청나게 기뻤다.

마침내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시를 쓰게 되었는데 그래서

뭘 쓰지? 그러니까 난 뭘 쓰고 싶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뭐가 시지? 시가 뭐지?

까지 다다랐던 것 같다.

교보문고에 가서 시집을 사자.

교보문고에 갔다.

시집이 있었다.

잠시 체면을 걸고 당시를 떠올려 보자면

<2020 신춘문예 당선 시집>

<밤의 팔레트>

<lo-fi>

<당신은 첫눈입니까>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등의 시집을 골랐던 것 같다.

지금 보니까 꽤 잘 고른 리스트 같아 보인다.

물론 교보문고에서 진열을 잘 한 탓이겠지.

아니, 지금 또 다시 생각해 보니까

시집을 처음 읽는 사람이 접하기 꽤 나쁘지 않은 리스트다.

신춘문예가 뭔지도 몰랐을 텐데 신춘문예 당선 시집은 왜 샀지?

(이쯤에서 기록하자면, 

내가 시를 처음 쓴 날은 2020년 12월 7일.

캘린더에 그렇게 메모되어 있어서

나는 그날을 마치 두 번째 탄생일처럼 여긴다.)

어떤 시집이 좋은 시집이고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책과는 거리가 엄청나게 먼 사람이었다.

좋은 글의 기준이 나에게는 없었던 거다.

그래서 아마 제목만 보고 샀겠지.

그렇게 난 시를 접하게 되었던가.


여기까지 쓰고 보니

타임타이머의 시간이 17분 남아 있다.

난 지쳤다.

나는 글을 오래 쓰지 못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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