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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낭토끼 Jul 07. 2022

천안 여행

여행일기 -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여행

 6월 6일 현충일이었다. 운 좋게 월요일에 공휴일이 있으면 금요일 퇴근하고나서부터 이어지는 휴일에 더욱 마음이 들뜨는 그런 주말이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이라면 언니와 함께 여수로 여행을 떠났어야 했다. 2022년이 시작되는 무렵 언니와 함께 이렇게 길게 휴일이 있는 때는 무조건 자주 못 가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자며 1년 계획을 다 세워놓았었다. 6월의 현충일이 있는 공휴일이 끼어있는 주말은 여수였다. 


 근데 이런저런 이유들도 여수를 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긴 휴무에 집에만 있을 리 없는 나다. 신랑과 하루하루 다닐 수 있는 곳으로 알차게 여행을 계획해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일요일에도 외출을 당연히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우리 내일은 어디를 갈까 하며 이야기하다 신랑이 예전부터 가고 싶다고 얘기했던 독립기념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렴풋이 가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독립기념관이다. 하지만 나의 어릴 적 기억의 그곳이 과연 독립기념관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랑은 어려서 학교에서 소풍으로 그곳을 다녀온 기억이 있는데, 너무 컸고, 다 보지 못했고, 어려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지금 간다면 더욱더 열심히 보고 올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였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어딜 가보고 싶다 하는 이야기 나오면, 우리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당장 떠나는 우리들이다. 신랑이 계획한 여행에도 내가 계획한 여행에도 토다는 법이 없다. 

 그래서 독립기념관 여행도 계획하게 되었다. 전날 운영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원래 월요일은 휴무인 독립기념관이지만, 공휴일이 월요일인 경우 휴무가 하루 뒤로 밀린다고 안내되어있었다. 가자고 마음먹었는데 휴무였다면 또 언제 가게 될지 몰랐을 그곳인데, 정말 다행스럽게 휴무가 아니라는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아직 아이가 어리다 보니, 과연 이곳 독립기념관에 방문해서 지루해하지 않을까를 걱정했던 우리였다. 하지만 이런 걱정들은 알고 있다는 듯, 독립기념관에서는 초등학생부터 체험이 가능한 함께하는 독립운동이라니느 체험관이 운영 중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들어갈 생각으로 오전 11시 체험을 예약해두었고, 다음날 비몽사몽 한 아이를 데리고 천안여행을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는 반가웠지만, 내리는 비에 길이 막히는 건 반갑지 못했다. 독립기념관 도착을 얼마 앞두고 체험관에서 안내전화가 걸려왔다. 예약을 하셨는데 체험을 진행하는 것이 맞는지, 체험을 진행해보셨는지, 독립기념관에 들어와서 체험관까지 오는 길을 상세하게 아주 친절히 알려주는 전화였다. 11시에 체험을 예약하였지만, 10시 50분까지는 체험관에 도착해야 하고, 주차장에서부터 체험관이 있는 겨레의 집을 들어오는 길까지 아이와 함께 걷는다면 20분의 시간이 걸린다는 안내도 해주셨다. 원래는 도착시간이 넉넉하였지만, 길이 막히다 보니 운전하는 신랑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에서 내려서 겨레의 집을 향해 들어가는데, 신랑도 나도 급한 마음에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또 내리는 비를 분명히 확인하였음에도 우산도 하나 없이 겨레의 집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체험 끝나고 나서 다시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에 잠깐의 당황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독립기념관을 처음 마주한 나의 첫인상은 크다였다. 그리고 역시 내가 어렸을 때 다녀왔다 생각하는 그곳은 독립기념관이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독립기념관을 상징하는 겨레의 탑도 겨레의 집도 가까이 다가가면 다다 갈수록 그 웅장함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였는지, 아니면 실제로 거리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겨레의 집은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느낌도 들기도 하였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겨레의 집에 도착하니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조각상은, 교과서에서 자주 보던 조형물이었다. 이것 또한 이렇게 크기가 크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확실히 사진으로 볼 때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도, 눈으로 담아낼 때의 감동과 그 분위기는 카메라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되었다. 

드디어 도착한 함께하는 독립운동 체험관, 입구에서 예약자 명을 확인하고 예약된 사람 수를 확인한 후에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서 계단처럼 보이는 곳에 앉아서 대기하다 보면 직원분께서 오셔서 이용방법에 대한 안내를 짧게 해 주시고 영상을 하나 보는 것으로 체험이 시작된다. 영상은 독립과 관련된 영상으로 격앙된 목소리의 대한독립만세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여 같이 만세를 외치고 싶어지는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나고 나면 주어진 50분의 시간 안에서 체험관을 자유롭게 이용하면 된다. 체험이 끝날 시간 즈음 안내방송을 통해 체험시간이 끝나감을 알려주시니까 시간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즐기다 보면 어느덧 5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있다. 시국 때문인지 독립군 유격훈련이나 자전거 타기 같은 몸을 사용하는 체험 같은 경우 점검을 이유로 막아두었다. 아이가 아무래도 몸 쓰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이런 것을 하는 것도 좋아하였을 텐데, 다음에 왔을 땐 하지 못했던 체험들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체험관에 있는 대부분의 체험은 터치 스크린을 이용한 체험이었다. 덕분에 스마트폰에 익숙한 아이들은 체험을 아주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런 체험을 하다 보면 엄마도 아빠도 더욱 신나게 집중한다. 그래서 인가 우리는 50분의 시간이 모자랐다. 못해본 체험도 많았다. 다음에 방문한다면 더욱 새로운 기분으로 체험을 진행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가까이되는 시간을 열심히 집중하다 보니, 체험이 끝나고 나서 배가 고파졌다. 독립기념관 주차장에서 겨레의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여러 가지 밥집들을 보았지만, 쏟아지는 비에 우산이 없던 우리들은 주차장 가까이까지 이동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라면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컵라면 점심이 너무 즐거웠겠지만, 기왕이면 건강한 걸 먹이고 싶은 엄마로서는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대목이었다. 뭐 그래도 아이도 신랑도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는 사실은 참 좋았다. 비 오는 날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컵라면은 더 맛있었다. 


 우리가 맛있게 점심을 먹는 동안 비가 그쳤다. 그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를 생각한다면, 조금 더 오래 많이 내려주어도 좋을 텐데, 소나기처럼 후드득 내리고 끝내는 비가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덕분에 독립기념관 내 전시실을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없어졌으니, 이건 이거대로 감사한 일이었다. 후드득 내리는 소나기 덕분에 편의점에서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식후 커피까지 마실 수 있는 시간을 벌은 샘이었다.  

 이제 정말 전시실을 둘러봐야 할 시간이었다. 이런 박물관에 오면 전시된 것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는 신랑과 나는 관람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전시관 하나를 관람하는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려서, 애초 계획했던 것만큼 전시실을 다 둘러보지도 못했고, 야외전시실은 둘러보지도 못했다. 다른 전시실도 우리가 이날 보았던 전시실처럼 볼거리가 가득하다면, 아마 우린 다음 방문에서도 야외전시실은 둘러보지 못하고, 실내 전시실 둘러보는데 시간을 다 쏟아부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처럼 박물관에 와서 관람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들이라면 독립기념관은 최소 3~4일은 걸려서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전시물 하나하나 그만큼 느끼는 것이 많았고, 생각하는 것이 많았던 곳이었다. 


 처음 1전시관은 겨레의 뿌리라고 적혀있는 건물로 들어가면 된다. 겨레의 뿌리라는 전시실의 이름답게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 수 있는 전시물이 있는 곳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해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해놓았는데, 신랑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국에 있는 박물관을 함축해서 다 옮겨놓은 느낌이라고 하였다. 

 겨레의 뿌리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조금 의아하다 생각하였던 부분은 연대별 정리를 해둔 부분에서 통일신라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불과 얼마 전 경주여행을 다녀오면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 나들이를 하고 와서인지, 이곳 독립기념관에서 통일신라를 제외시키는듯한 전시물에 갸우뚱하게 되었다. 


 감히 짐작해보건대, 신라가 통일을 이룰 때 자주적인 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중국의 당나라와 손을 잡고 나당연합군이 이룬 통일이라는 데에, 통일신라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 전시실에 전시되어있는 시대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삼국시대 고려와 발해 조선의 흐름이었다. 삼국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많다고 느꼈는데, 광개토왕릉비가 외부 전시실에도 여기 1 전시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만 보아도 신라보다는 고구려의 기상과 자주적인 모습을 강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배웠던 역사 지식을 더해본다면, 분명 고구려가 중국을 잘 방어해준 덕에 우리는 중국화 되지 않을 수 있었고,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고구려는 열심히 항쟁하였고, 지지 않았다. 수나라의 태종이 임종 시 태자에게 다시는 고구려를 쳐들어가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일화를 생각해보면 당시 고구려의 항쟁이 얼마나 짙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어딜 가나 전시의 마무리는 기념품 쇼핑이다. 전시실을 모두 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1 전시실에 있던 기념품샵의 직원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여기 독립기념관의 전시실에 기념품샵이 있는 곳은 1 전시실뿐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신랑도 아이도 기념품에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 골라 구입해버렸다.  

 

 신랑이 고른 기념품은 윤봉길 의사를 캐릭터 화한 열쇠고리였다. 아이가 고른 캐릭터는 유관순 열사였는데, 열쇠고리가 없어서 피규어를 샀다. 아이는 유관순 열사의 캐릭터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집에 와서는 이걸 보고 그림을 그려 며칠을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아이에게 유관순 열사에 대하여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누구인지, 이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념품 하나를 구입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중에 집으로 오면서 안 사실이지만, 유관순 열사는 천안이 고향이었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천안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야기를 천안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우내 장터를 발견하면서 알게 되었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에 있지 않나 싶다. 

   

 1전시관을 관람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영화관을 보여주는 MR전시관이었다. 요일마다 시간마다 다른 4D 영화를 보여주는 곳인데, 아이들이 보기 좋게 애니메이션화 된 영화를 보여주었다. 아이에게 방문하기 전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더니, 영화를 다 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서 시간 맞춰서 이동하였다. 첫 방문이라 몰랐던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영화를 볼 인원이 모두 함께 들어가야 좌석을 그만큼 선택할 수 있고, 선착순으로 좌석을 선택할 수 있으니 영화가 2시 정각에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2시에 가면 영화를 못 볼 수 도 있다는 점이다. 


 첫 관람은 멋도 모르고 시작하기 10분 전쯤 갔다가 가장 앞자리에 겨우 세명이 같이 앉을 수 있었다. 가장 앞자리도 나쁘진 않았지만, 4D 영화라 그런지 멀미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영화는 처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방문했고, 맨 뒤에서 봤는데 아이도 신랑도 나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관람하는 MR전시관이 특별기획전시실 옆에 있었는데, 특별기획전시실에서는 미국과 함께한 독립운동과 한인애국단 1932년 그들의 임무가 전시 중이었다. 전시 기간을 두고 전시하는 특별전시이니만큼,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전시라는 생각에 신랑과 이곳부터 관람을 하자며, 2 전시실을 두고 특별전시실에 들어갔다.  

 특별기획전시실은 1관과 2관으로 구분되어있었다. 먼저 미국과 함께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1관에서는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찾아온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식민지는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격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있었다. 아시아의 국가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개항을 하였던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병참 기지화한 아픈 역사는 결국 일본이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맞으며 전쟁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면서 끝이 난다. 이러한 흐름을 알 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은 미국의 군인이 되었고, 전쟁에 참여하면서 미국과 함께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에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광복이 맞이한 그날 대부분의 사람이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일본의 천왕은 라디오로 전쟁에 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는 그 소식이 잡음과 섞이며 사람들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뿐더러 요즘처럼 SNS로 빠른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당시를 생각해본다면,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단 한순간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어본 적이 없으며, 그 의지가 모여 결국은 독립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미국이 있었고, 함께해 준 다른 나라들이 있어 독립운동을 하셨던 그분들이 조금은 든든했으리라, 서러운 순간에도 나라를 찾으려는 의지를 더욱더 다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특별기획전시실 1에서 특별기획전시실 2로 가는 중간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있었다. 달팽이 로봇을 움직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것 역시 스마트패드로 좌우로 움직이는 거라 아이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로봇을 작동시켰다. 


 독립기념관을 관람하며 느꼈던 점은 아이들마다 다르겠지만, 지루해하고 어려워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곳곳에 굉장히 많은 재미를 추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예전 이런 박물관의 모습과 달라진 점이라면, 터치 스크린을 이용하는 터치가 익숙한 세대에게 걸맞은 터치를 통하여 직접 작동시켜보고 체험해보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글씨를 읽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아이들은 이런 터치 하나만으로도 즐거워한다는 점이었다. 박물관 곳곳에 이런 곳이 있다 보니 나의 아이 역시 지루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전시물 구석구석을 누비며 관람하였다. 

 이곳은 특별기획전시실 2 한인애국단 1932년 그들의 임무 전시다. 역사 시간에 모두 배운 내용이고,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전시를 통해 또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신 분들은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전시물 중에는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자신이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독립을 위해 힘쓰라는 말을 남긴 윤봉길 의사가 대단하다 생각되었다. 내가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담기엔 부족한 느낌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살피면 살펴볼수록,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민중이 멱살 잡고 끌고 온 나라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었다. 예전에 정말 열심히 시청했던 미스터 선샤인에도 보면 일본이 대좌가 하는 대사 중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부모의 자식은 지금도 의병이 되었다"라는 대사였다. 당시엔 별생각 없이 지나친 대사였는데 윤봉길 의사의 편지를 읽으니 나도 모르게 그 대사를 되뇌게 되었다. 

 

 김구 선생님께서 담화문에서 말씀하시길 그 청년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나지만 그중 살아있는 것은 나뿐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과연 그분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누구였을까, 그분들의 독립에 관한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전시였다. 

 중간에 아이가 보고 싶다고 하였던 영화 관람을 하면서 특별전시실을 왔다 갔다 하며 관람을 마치고 이제 드디어 겨레의 뿌리 바로 옆에 있는 겨레의 시련 2 전시실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런 전시물도 그렇고 무슨 영화를 봐도 책을 봐도 감정적 정신적 소비가 큰 나로서는 사실 겨레의 시련이 주제가 되는 2 전시실은 굉장히 힘들었다. 

 

기억해야 하는 가슴 아픈 역사가 맞지만, 너무 아픈 역사다 보니 그 역사를 마주하는 전시실에서 나는 많은 감정적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그래서 전시실 2를 둘러보고 난 후, 사실 신랑은 전시실 3을 중간까지만 보더라도 조금만 더 봤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나는 겨레의 시련을 마주하며 소모한 에너지로 체력이 바닥이 나면서 더 이상의 전시 관람은 무리라고 생각해 결국 전시실 2까지만 보고 독립기념관을 다음 기회에 다시 오자며 다짐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이날 우리의 마지막 관람을 책임져 준 겨레의 시련은 전시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겠지만 말 그대로 우리의 시련을 모아 놓은 전시실이다.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자면, 아마도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 시기의 조선과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난 지는 한참 되었고, 권력층은 자신의 몸집을 부풀리기에 바빴던, 허수아비와 같은 왕을 세워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우리나라 밖의 흐름은 전혀 주시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식민지는 세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여, 침략 후 우리 국민들이 받았던 아픈 역사가 아닐까 싶었다. 근대화가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었을지, 실제로 우리의 시대를 스마트하게 바꾸어놓았던, 아이폰의 첫 등장을 생각해본다면, 잡스가 이끌었던 이 시대의 변화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 생각해본다면 그 당시 급격하게 변하던 근대화가 얼마나 혼란 그 자체였을지 상상된다. 


 그 혼란 속에서 우린 식민지화되었다. 민족차별적인 지배를 받았고, 병참 기지화되어 우리나라 곳곳이 파헤쳐졌다. 독립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는 경우는 허다했고, 성인 남자라면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는 일 또한 허다했다. 그 당시의 고문에 대한 전시도 해놓았는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강도를 낮추고 영상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놓았는데, 그마저도 아이에게는 무섭게 느껴졌는지, 아이는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도망가버렸다. 

 

 영상을 순화시켜 만들어놓은 것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그 당시의 고문은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잔인했을까 생각하면 까도 까도 자꾸 나오는 그들의 만행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는 병참 기지화되면서 끌려간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있었다. 나의 아이와도 별로 나이차가 나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끌려가 노동을 하였으며, 군인이 되어야 했고, 성노예로 전략했다. 아이를 둔 부모들이라면 속이 뒤집어지는 아픈 역사를 마주하고 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겨레의 시련 전시실이 관람 방향으로 관람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나의 마음도 정신적으로도 피곤 해진 건 전시실을 들어서면서부터 예고된 일이 아니었나 싶었다. 

 시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나의 체력적 정신적 한계로 인하여 전시실 2에서 관람을 멈추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독립기념관을 나오는 길 급하게 들어가면서 보았던 백련못에 아이가 물고기 밥 주기를 하고 싶다고 졸랐다. 물고기 밥을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어, 아이와 함께 자판기를 이용했다. 멀리서 볼 때는 안보이던 물고기들이 사람들이 주는 밥에 익숙해졌는지, 발소리만 들려도 몰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입을 뻐끔거리는 것이 어찌나 무섭던지, 아이와 신랑에게 물고기 밥을 맡기고는 돌아서 나와버렸다. 


 오전부터 하루 룰 꽉 채워 관람하였지만, 다 보지 못했던 독립기념관, 외부 전시실은 하나도 둘러보지 못하여서 다음번 관람을 꼭 기약할 수밖에 없었던 방문이었다. 신랑이 이곳을 가자고 먼저 말해준 것도 너무 고마웠고, 관람 후에도 길게 남는 여운에 다녀오길 참 잘했다 생각되었던 독립기념관이었다. 


 천안에 와서 독립기념관 한 곳을 보았지만, 나는 그분들을 기억해야곘다고 생각했고, 이날의 여운을 되도록 오래오래 새기며 나의 아이에게도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더욱 자주 우리의 역사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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