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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Sep 13. 2023

‘죽음의 죽음’을 통한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탄생

오펜하이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원자폭탄의 발명으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의 인구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한 번의 타격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현대세계의 시발점을 원자폭탄의 투하라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또한 귄터 안더스는 1945년 이후 인류는 이미 사라졌다고 선언한다. 인간에 의한 인류 전체의 파괴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 규정과 선언은 인류의 삶과 죽음의 조건을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레비나스는 죽음이 절대적 타자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죽음이 있다는 사실 외에 그 무엇도 경험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펜하이머는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나는 죽음이요, 파괴의 신이 되었다.


주체로서 죽음이 상정되는 이러한 규정은 그가 원자폭탄의 창조주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죽음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역설적 상황에서 비롯된다. 원자폭탄은 유기체의 생존, 더 나아가 죽음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에 그렇다.


다음은 김홍중의 말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이 대규모로 사멸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생명 그 자체’가 유지될 것이라는 희망이 꺼진 적은 없었다. 핵은 이와 같은 재난의 상상계에 전대미문의 어둠을 드리운다. 방사능과 죽음의 재, 혹은 핵폐기물은 생명체들을 살상하고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생명체들이 이어가고 구성하는 ‘생명 그 자체’에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가하기 때문”이고 또한 “호모사피엔스의 죽음은 (···) 죽음을 맞이하고 주검을 처리하는, 문화적으로 축적되고 전승된 관습들의 맥락에서 의미가 부여되는 사회적 사태다. 그러나 피폭으로 죽은 자의 시신은 더 이상 인간의 시체가 아니다. 인간의 시체로서 적절한 의례를 통해서 씻기고, 애도되고, 매장되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죽은 자의 몸은 방사성 유해물질이 확장된 오염된 사물에 불과하다. — 『사회학적 파상력』 중 「미래의 미래」 일부분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삼단논법의 유명한 확증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이라는 사태는 확실성과 필연성을 보장하는 거의 유일한 인과관계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피폭이 유기체의 생물학적 · 사회적 죽음마저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태를 초래함에 따라 종말론의 영토는 ‘삶의 불가능성’에서 ‘죽음의 불가능성’으로 확장된다.


‘죽음의 불가능성’을 가능한 논의로써 타당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원자폭탄이 세계의 산술적 환원에서 확률의 세계로 과학적 패러다임을 전환한 양자역학을 따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확정성 원리의 연쇄작용으로 비롯된다.

 0에 가깝다.

이는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루만은 이를 ‘우연성’으로 정의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필연성과 불가능성은 더 이상 세계질서의 근간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에 근거해서 수용해야 하는 양상일 따름이다.” 우연성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죽음의 불가능성이 개연성 있는 종말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그 내용은, ‘죽음도 죽는다.’


또한 이는 인간의 행위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축소되었음을 뜻한다. 더 이상 유일한 신(확실성과 필연성, 아인슈타인의 과학)이 아니라 다원성(불확실성과 우연성, 오펜하이머의 과학)이 세계를 규정하고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에 루만은 근대 사회를 재정의한다. “사회는 더 이상 아닌 것과 아직 아닌 것 사이에서 부유한다.”


결론적으로 오펜하이머가 창조한 원자폭탄은 죽음의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사태를 초래함으로써 우연성의 시대를 열어젖힌다. 이는 원자폭탄이 인류, 더 나아가 전 생명체의 발화(發火)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 발화(發話)는 인류 전체의 발화로서 더 큰 화재(火災)로 번져야 마땅하리라.


‘죽음의 죽음이라는 불을 통해 인류는 진정으로 파괴의 신이 되었다.’


인류에게 불을 쥐어준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오펜하이머를 통해 다시 쓰인다. 과거의 프로메테우스가 창조를 노래했다면,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파괴를 노래한다. 죽음마저 불가능해지는 시나리오가 개연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는 창조자의 의지와 무관하며 확실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은 우연한 세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인류의 번영을 가져다준 대가는 똑같이 가혹하다.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인류는 언제 도래할지 모를 우연한 총체적 파멸에 노출됨으로써 공포와 죄책감에 영원히 시달리는 것이다.


孫潤祭 2023. 0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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