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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Sep 13. 2023

To Infinity and Beyond!

이동신,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 리뷰


휴머니즘의 시선,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땅을 향한다. 철학자 헤겔은 근대 철학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제야 본래적으로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철학에 이른 것이며, 이러한 철학을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본래 자명한 철학에—즉 철학이 자명하게 이성으로부터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식이 참된 것의 본질적인 계기라는 것을 아는 그런 자명한 철학에—발을 들여놓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집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선원이 거친 바다를 오래도록 항해한 후 ‘땅’을 어떻게 부르는지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시기에 원칙은 사유, 즉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사유이다. — 하이데거, 『숲길』 중 「헤겔의 경험개념」


휴머니즘의 중요한 관심, 즉 확고부동한 육지를 향한 시선은 데카르트와 칸트에 의해 마련됐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데카르트가 마련한 것은 인간이 확실하고 안전하게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육지이다. 이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도출된 너무나도 유명한 명제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표현된다. 인간은 사유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믿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확고부동한’ 땅[자기의식] 위에서 비로소 안전하게 자신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했다는 의의 때문에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두 번째로 칸트가 한 작업의 중요성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철학적 관심을 인간 밖, 즉 물자체가 아닌 인간에만 오롯이 집중할 것을 요구한 것에 있다. 칸트는 세계가 “이성의 구조를 통과할 때에만 경험 가능한 현상”이 되기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을 넘어 실재 자체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경험의 한계를 망각한 이성의 월권”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관심을 제한시키고자 했다. 즉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관심과 노력을 무엇이 있을지도, 도래할지도 모를 미지의 바다[물자체]에 쏟기보다는, 확실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육지[인간]에 묶어두려고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의 시선과 관심을 바다가 아닌 육지로 묶어두기 위해 우선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이분법[자기와 타자,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등]을 공고히 함으로써 자신의 토대를 만든다. 이분법은 은밀하게 비인간 존재에 대한 인간존재의 우위가 설정된 것이다. 이는 “지식을 향한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 즉 인간 정신과 우주가 똑같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믿음에 기반한 휴머니즘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권리,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둔 과학을 무기로 비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현대 물질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구축한 사회와 환경은 심각한 모순에 봉착한다. 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가 세계의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고, 다양성이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었으며 더 나아가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계층 · 인종 · 민족 · 성별 등의 단절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서로를 향한 표현과 테러가 증가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환경에서 한편으로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들로 이루어진 과학적 진보가 인류의 엄청난 진보를 이끎과 동시에 인류세에 도달했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 점점 더 자연을 이용하고 통제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반대로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는 정도로 파괴적이고 광범위한 지구온난화와 지질학적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봉착한 휴머니즘의 땅에서 몇몇 사람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삼켜버리고 휴머니즘의 흔적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미지의 바다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포스트휴머니즘이다. 이들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시킴으로써 인간과 타자의 구분 없이 서로의 공생과 공진화가 가능한 미래를 기대한다.


다음 글부터 본격적으로 소개할 책인 이동신의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의 첫 문장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의 바다로 잠시 시선을 돌려보자.



“사람과 사물”, 그냥 보면 참 “오만”한 말이다.


출처 입력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장벽을 허무는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담론과 수행의 공동체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동시에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휴머니즘의 흔적이 사라진 미래를 그림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을 도모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휴머니즘의 큰 흐름에 서로 다른 세 인물이 동참한다고 보고, 서로 다른 담론을 한 책으로 엮어 소개한다. 이는 21세기를 향한 그들의 절실한 감정이 “급진적 타자성을 향한 새로운 종류의 포스트휴먼적 공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은 더 이상 따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물론 서로 섞인 물결들로 속도도 빨라지고, 파랑도 일어나고, 소용돌이도 생기면서 험난한 물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이면서 강은 더 넓어지고, 더 많은 물줄기를 담아내게 된다. 그리고 강물은 토양을 옮겨 삼각주를 만들어 내고, 그곳에 불가능한 듯 보이지만 “도래”하리라 믿어야 하만 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미래가 자라날 것이다.”(28)


가장 먼저 저자의 시선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헤일스로 향한다. 헤일스의 주요 관심사는 테크놀로지이다. 그의 담론은 테크놀로지의 허상이 숨기려 하는 몸과 물질성을 복구함으로써 인간의 윤리적 의미를 재정위 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기존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담론들이 인간의 안녕, 즉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구조물이었음을 드러(들어) 내려는 것이다.


기존의 기술에 대한 담론들, 즉 기술적 진보가 되려 인간에 해가 되지 않을지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전통의 유지나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는 담론(테크노포비아)이나, 인간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에 기인하는 혁신적 변화와 과감한 투자요구(테크노필리아)는 모두 인간의 안녕을 목표로 논의되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헤일스가 우려하는 점은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탈체현화를 위한 도구로서 이용되는 것이다. 여기서 탈체현화란 정보처리를 통해 시스템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기계와 인간이 유사하다는 사이버네틱스의 중요한 전제를 바탕으로 인간이 자신의 몸(물질성)을 지양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정신을 기계에 업로드하는 생각, 더 나아가 인간이 육체의 제약과 필멸을 벗어나기 위해 로봇 몸을 가진 “엑스 휴먼”이 되거나 생명공학과 의료기술을 통해 노화나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트랜스휴먼”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과 꿈의 이면에는 정신을 위해 몸을 파괴하거나 개조할 수 있다는 폭력성과 이를 감수하겠다는 일관된 태도를 함축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는 21세기에 이르러 여러 사업가(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와 과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영화 《매트릭스》나 넷플릭스 《블랙미러》 시리즈)을 통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에 헤일스는 기술적 진보에 따른 탈체현화를 중심으로 하는 논의들이 정신의 우위가 신체의 폄하를 강조하는 인간중심주의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 기인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라져가는 몸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몸을 지양하지 않는다는 것, 즉 탈체현화가 아니라 체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헤일스는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을 주도한 <메이시 학회>의 역사를 살핀다. 그리고 학회의 주요 주제를 다음의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하는데, 이는 기술적 존재와 인간의 몸,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정보와 물질성의 관계 변화를 고찰하기 위함이다.


(1) 항상성: 이는 정보의 탈체현화를 통해 인간과 기계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 “몸이 제거된 것으로 정보를 상정해야만, 인간과 기계라는 서로 다른 시스템 사이를 자유롭게”(61)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일스는 이러한 동질성이 인간과 기계의 동등함이 아니라, 반대로 기계라는 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2) 오토포이에시스: 기존의 생물학 연구에서 사이버네틱스로 영역을 확장시킨 이 개념은 신경시스템의 자기 반영적인 역학으로 인해 시스템의 독자성이 확보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경 시스템의 활동은 신경시스템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시스템의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어 있지만,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시스템의 자체적인, 즉 자기 반영적인 신호로 전환되어 내부에서만 순환”(68)함으로써 시스템의 독자성을 담보하는 경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핵심은 과정을 통해 봤을 때, 인간의 의식은 시스템을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가 아닌 시스템의 부산물로 여겨진다. 이에 “의식이 부수현상으로 축소됨으로써, 인간이라는 시스템을 규정하는 과정에 체현화가 들어갈 틈”(70)이 생긴다. 바로 이 “틈”에서, 인간중심주의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3) 창발: 인공생명(인공지능이 대표적)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예측할 수 없는 발전을 말한다. 이는 스스로 진화하는 기계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며, 인간과 기계의 공생과 공진화가 가능한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도면이 된다. 헤일스는 인간과 인공생명이 공생하는 새로운 세계를 “계산적 우주”라 부른다.


두 번째로 헤일스의 작업은 문학과 글쓰기 그리고 디지털 텍스트의 영역에서 수행된다. 이는 문학이 “문화적 순간에 숨겨진 역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50)를 파악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그의 신념에서 기인한다. 그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문학 내러티브, 달리 말해 언어와 코드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중개’라고 명명하며, 중요한 것은 한쪽이 반대쪽을 완전히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코드가 시간에 따라 여러 미디어를 통해 (상대적으로 언어에 비해) 점유율을 높이고 있지만, 이로 인해 인간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완전히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헤일스는 이러한 중개 과정에서 인간의 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은 미디어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매체이면서도 미디어에 의한 체화된 반응을 산출함으로써 인간의 몸은 미디어와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몸은 언어와 코드의 일방향적 동일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히려 언어와 코드의 상호 협력을 통해 언어적 차원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지속적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정리해 보자. 헤일스의 이상은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다. 헤일스의 첫 번째 작업이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이 결코 몸의 삭제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배타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공생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두 번째 작업을 통해 언어에서도 같은 가능성을 타진한다.


나아가 그는 인간과 디지털 미디어 간의 긴밀한 협력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한 공존과 공진화를 테크노제네시스 개념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새로운 학문 분야의 필요성을 촉구하면서도,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구분을 놓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 사이에 인문학과 인간의 몸을 위치시키기 위함이다. 이 ‘틈’에서 비로소 헤일스의 포스트휴머니즘은 흐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비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주요한 목적인 포스트휴머니즘의 논의가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곧 헤일스 담론의 한계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헤일스의 담론을 비유적으로 정위 하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가 되지 않을까?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가고는 있지만, 아직 바다는 아닌 것이다. 저자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기치인 비인간 존재에 대한 논의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주요 주제인 울프의 담론으로 흘러간다.



울프의 문제의식은 인간도 동물이라는 불변의 사실을 망각(부정)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독립된 존재라고 상정한 뒤, 비인간과 자의적인 구분을 행했고, 이는 대단히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예시로써 인권을 모델로 하여 동물권이 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동물에게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모순을 제시하기 위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공장식 축산을 비교한다.


첫 번째로 나치는 “이전에 시민이었던 이들”의 “법적 보호와 권리를 빼앗은” 것이고, 공장식 축산에서는 “한 번도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던 이들에게 최소한의 보호(e. g. 인도적 도축법)가 제공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인종청소는 “해당 집단의 일원들의 제거”를 목표로 하지만, 공장식 축산은 더 많은 동물을 죽이기 위해 더욱 많이 사육한다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통제를 최대화하는 관습”을 수행한다.


때문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구분을 철폐하지 않는다면 위의 폭력성은 지속될 것이므로 인간과 동물의 공생과 공진화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창조적인 힘으로서의 동물성 또한 사라질 것이고, 이는 인간 자신의 다양성을 발견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최악의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울프는 “인간과 동물, 모두가 결국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반하여 생명정치의 지점이 새롭게 확장된 생명공동체, 즉 인간과 비인간의 자의적인 구분이 사라진 포스트휴머니즘의 영역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울프의 담론을 살펴보자. 울프의 담론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과 오토포이에시스, 루만의 시스템 이론의 세 가지 담론을 결합한 형태로 전개된다. — 이러한 서로 다른 학제 간의 종단과 융합이 가능한 것은 그의 담론이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무한성을 담보하는 데리다의 전제를 따르기 때문이다.


우선 데리다는 동물이 인간 개념의 태생적 구조성인 “가장 다른 다름”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향하는 동물의 시선을 감지함으로써 비인간 자체와 마주하고, 절대적 타자는 인간 너머의 (언어적인) 흔적을 필연적으로 남기게 된다. 다음으로 오토포이에시스는 이질적인 요소의 자극과 신호에 반응함으로써 자기를 수정하고 안정성을 획득함으로써 보다 발전된(닫힌) 시스템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루만은 시스템 자체보다 시스템을 둘러싼 환경이 압도적으로 복잡하다고 설명함으로써 (보다 복잡한) 이질적 요소는 시스템 내에서 완전히 소화되지 못한 채 흔적으로 남게 된다고 설명한다(만약 시스템의 안정성을 이유로 흔적을 부정하고 은폐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억압과 통제가 수반된다). 이때 시스템에 남아 있는 이질적인 요소, 즉 타자의 흔적은 시스템을 외부와 연결시키는 일종의 창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를 통해 안정성을 획득한 시스템은 닫힌 듯 보이지만, 실은 언제나 이미 열려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말한다.


데카르트(인간의 사유 행위 자체가 존재의 확실한 영토)와 칸트(물자체 인식의 불가능성으로 인한 주변환경의 배제)로 대표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은 “자기지시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닫힌 존재로 본다.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가 강조되었고, 근대 이후의 수많은 개념과 제도가 이러한 차이를 생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노골적으로 수행해 왔다. 그러나 울프는 인간이라는 시스템에 필연적으로 비인간 존재의 흔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시스템의 순수성과 독립성을 해체시킨다. 이로 인해 인간과 비인간 존재 관계에 영속적인 개방성이 확보되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재고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새로운 관계에서 빚어지는 정체성이 바로 울프의 포스트휴머니즘이 펼쳐질 수 있는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프는 재고된 정체성을 통해 확장된 생명공동체를 제시하지만, 동물을 넘어 또 다른 비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물은 물론이거니와 식물, 미생물을 포함하려는 생명 일반으로의 확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담론은 포스트휴머니즘의 바다에서 대륙과 가까운 연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에 저자는 또다시 확장성을 요구하며 시선을 돌린다. 그곳은 바로 대양, 즉 담론에 인간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개체를 포함하는 신사물론의 영역이다.



하먼은 모든 사물이 존재론적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사물론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하이데거 철학을 현존재(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와 언어가 아닌 도구존재를 중심으로 재정의 · 재편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가 제거된 실재적 철학을 도모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와 ‘도구존재zuhandenseit’라는 측면이 있지만, 후자를 통해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는 현존재인 인간뿐이다. 달리 말해 도구존재로서 모든 사물은 “로서의 구조as structure”에 속해 있는데도, 마치 인간만이 그 구조를 점유한다고 착각한다는 뜻이다. 하먼은 비유적으로 인간과 사물 모두 “로서의 극장 안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데도, 하이데거는 인간에게만 배역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225)


하먼이 보기에 하이데거의 연구는 두 가지 한계가 있다. 첫 번째로 도구(~을 ‘하기 위한’ 무언가)를 현실적 도구와 대응시킴으로써 협소해지는 도구존재에 대한 이해, 두 번째로 현존재가 철학의 토대라는 생각에 기인하여 실재가 철학적 논의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도구는 인간이 언어라는 그물망으로 포획하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만 중요하게 다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때문에 하먼은 인간과 도구를 등치 시키고,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져 왔던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 능력을 모든 사물이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가진 특수함과 우월성을 해체시킴으로써 철학의 영원한 고향인 실재, 즉 사물의 세계를 철학에 돌려주고자 하기 위함이다.


본격적으로 하먼의 철학을 살펴보자. 하먼은 도구의 성격을 “지시성”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지시성이란, 도구가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무언가는 드러내지만 스스로는 사라지는 도구의 양가적인 성격을 말한다.


다만, 이는 도구들의 지시 기능에 따라 철저하게 결정된 것이지 인간이 도구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달리 말해 도구의 지시성이 일어남에 있어 인간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또한 하먼은 자신의 철학의 기본 교리가 ‘모든 인식적 그리고 인과적 관계로부터의 사물의 물러남’이라고 역설한다. 그 어떤 객체도 직접적으로 서로를 대면하지 않음으로써 객체들은 다른 객체의 현실을 완전히 소진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먼은 객체들의 물러나 있음이 상호작용과 관계의 발생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사물들의 보이는 실재와 보이지 않는 실재가 서로 다른 층위(단계level)에 있기 때문이다. 사물은 보이지 않는 실재로서 감각적 요소들은 대리의 인과율을 통해 보이는 단계의 층위에서 서로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창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사물의 ‘매력’이다. 매력은 각 객체들이 분리되어 있음에도 감각적 요소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의 두 축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성좌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굉장히 멀리 있는 각 항성들에 (아직은) 직접 도달하고 경험할 수 없지만, 항성들이 방사하는 빛을 도구를 통해 관찰할 수는 있다. 그리고 각기 다른 항성들을 별자리를 통해 편제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관계를 만들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매력은 이렇게 만들어진 또 다른 단계의 실재에 대리의 인과율이 평범하고 반복적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역할을 겸한다. 달리 말해 두 개의 사물이 상호작용할 때, 우리는 그 사물을 각각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결의 결과로 나오는 “또 다른 단계의 실재”를 지각하는 놀라움을 느낌으로써 미학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하먼은 “매력의 열쇠는 의식이 아니라 진정성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매력 개념을 통해 지금까지 침묵하던(인간에게 목소리를 빼앗겼던) 사물들에 목소리를 다시 돌려준다. 사물이 발산하는 매력은 저 너머에서 신호를 보내는 보이지 않은 객체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 신호들이 우리의 감각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린다. 따라서 사물은 인간의 개입에 상관없이 스스로 물러서고, 스스로 관계를 맺을 가능성과 역동성을 확보함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정리해 보자. 헤일스는 사이버네틱스 담론 분석을 통해 몸을 느끼는 존재로서 인간과 인공생명의 긴밀한 협조를 요청한다. 울프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객관적 우월성을 해체시킴으로써 인간이 상실한 동물성을 되찾을 것을 촉구한다. 하먼은 사물이 발산하는 매력과 놀라움을 통해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 개체에 대한 사변적 고찰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필요할 것이라 재촉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포스트휴머니즘의 물살에 올라타라고 손을 내미는 셈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라는 장벽을 허묾으로써 인간 존재와 비인간 존재의 공생과 공진화를 꾀하는 미래를 그리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포스트휴머니즘의 도래가 단순히 휴머니즘의 이후(post)가 되어서는 안 된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거대한 내러티브, 즉 합리성에 따른 이성과 진보라는 메타내러티브의 종식으로 보았다. 또 루만은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던이라는 표어는 분명 그 자신의 통일성을 메타서사의 불가능성”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너무 많은 것을 허용할 것이다.”


인류 지성사와 역사를 이끌어 온 메타내러티브의 종식이 기존에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가치들이 그 의미를 상실하는 혼돈을 야기한다는 뜻이다. 다만 이러한 종식이 역설적으로 니힐리즘의 시작이 아니라 반대로 그 끝을 향한다는 것을 주지해야만 한다. 메타내러티브의 끝에서 우리는 가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가치들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회 안에는 사회에 대한 구속력 있는 어떠한 재현도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 체계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 형식의 성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 『근대의 관찰들』 「서문」 중 부분


존재망각을 야기함으로써 서양 형이상학 역사의 내면적 논리학이 바로 니힐리즘이었다고 말하는 하이데거의 해석 역시 이와 유사하다.


수 세기 동안 찬미되어 오던 이성이야말로 사유의 가장 완강한 적대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유[단순히 인간이성에 따른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그 이전에 스스로를 환히 밝히면서 우리에게 말없이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의 시원적 부름에 귀 기울이며 이러한 부름에 응답하는 사유]는 시작된다. — 『숲길』,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 중 부분


결론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류문명의 시작부터 함께 해온 인간중심주의라는 메타내러티브를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찾는 작업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원천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는 가치의 원천을 찾기 위해 항해를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육지를 떠나 바다로의 여정을 통해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으려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표어는 <토이스토리> 버즈 라이트이어의 명대사를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To Infinity and Beyond!


출처 입력


孫潤祭 2023. 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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