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그거'

ADHD의 사라진 기억 빈틈

by 지엔

ADHD인들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알 것 같거든요. 그런데 몰라요.

분명히 들었던 거고, 분명히 봤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근데 그게 뭔지 안떠올라요.


참 묘하죠.

어디선가 분명히 본 장면이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데,

그걸 손으로 붙잡으려 하면 '훅!' 사라져버립니다.

정말 0.1초 전까진 떠오를 듯 했는데, "아 그거" 하고 말로 꺼낸 순간,

연결이 툭 끊긴 듯 기억이 안나요.

막상 말하려니 머리가 하얘지고, 입안에서 맴돌던 단어는 흩어져 버리죠.


“아까 뭐라고 했더라?”

“그게 누구였더라?”

“거기 갔던 건 기억나는데, 이름이 뭐였지?”


이런 경험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한번에 여러 일을 처리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기억이 비어버릴 때가 있죠.

하지만 ADHD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이런 '기억이 멈추는 순간'이 훨씬 자주, 일상적으로, 강하게 찾아옵니다.

이는 단순히 뇌의 피로때문이 아니라,

정보를 저장하고 꺼내는 뇌의 매커니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더 답답해요. '내가 모르는게 아닌데','분명히 아는데' 그게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 사이에서 머릿속은 빙빙 돌고, 말은 막히고,

"나 그거 알아!" 라고 말은 꺼내놓고, 정작 그게 뭐냐고 물으면 말 못하는 모습에

'모르면서 아는척한다.'라는 오해도 받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거 하나 기억 못해? 나 왜 이렇게 멍청하냐." 라는 자기비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진짜 게으름도, 부족함도 아닙니다.

ADHD의 뇌는 정보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정보를 인출할 길을 잃은 거에요.

그 길은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분명히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해요.


"기억이 없는" 게 아닌, "기억에 접근이 안 되는" 상태

이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에요.

ADHD의 뇌는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기억을 꺼내오는 길이 잠시 막힌 상태'에 더 가까워요.

정보는 분명히 저장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 저장된 정보를 꺼내 쓰는 실행기억의 통로가 순간적으로 끊기는 거에요.

그래서 머릿속 어딘가엔 분명 기억이 있는데, 입밖으로 꺼내려 하면 하얘지고,

분명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고,

설명하려 하면 "아 그 그거 있잖아 그거..." 로 끝나버리곤 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순간에 특정한 기억이 갑자기 툭 떠오르기도 해요.

가령 아까는 "아 분명 아는얼굴인데.. 누구지?" 하고 안떠오르다가,

샤워중에 갑자기 "아 그때 그분!!" 하기도 하고,

길을 걷다 특정 냄새를 맡았거나, 혹은 아무 상관없는 노래나 단어, 대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아 그거!" 하면서 잊었던 정보가 떠오릅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ADHD 뇌의 기억 인출은, 논리적 연결보다는

감각적 단서와 감정 신호를 따라 움직이는 경향성이 강해요.

그래서 가령 어디선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었을 때

갑자기 '사랑은 돌아오는거야!!' 하는 대사가 떠오름과 동시에

'사랑사랑사랑 내사랑이야' 라는 노래구절이 떠오르고

또 사랑이 들어간 어떤 기억정보가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이지요.

즉, 논리적 맥락에서는 기억이 막히지만, '느낌이 닿는 순간'에는

뇌가 그 기억통로의 문을 열어버리는 거에요.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현상 뒤에는 여러 가지 뇌의 작동 방식이 겹쳐져 있어요.

우선, ADHD의 작업기억은 정보 자체를 유지하는 것보다,

정보들 간의 연결성을 유지하는 능력이 약한 경우가 많아요.


예를들어, 머릿속을 칠판이라고 생각하면,

일반적인 뇌는 그 기억칠판에 적힌

“선생님 말 → 과제 내용 → 제출 날짜”

이 세 가지를 어느 정도 한 세트로 붙잡아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ADHD의 뇌에서는, 이 세가지에 대한 각각의 기억정보는 있는데,

연결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아요.

선생님 말과 과제 내용, 제출 날짜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두는 선이 쉽게 끊어지죠.


그래서 나중에 떠올릴 때

"11월 10일까지 뭘 내야하는데, 뭐더라?"

"방금 뭐 적으라고 했는데, 뭐였지?" 와 같이

'기억의 조각'만이 남고 서사가 끊어진 느낌이 들게 되요.


두번째, ADHD의 도파민 시스템이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힘이 약하다는 거예요.

도파민은 단순히 “기분 좋게 하는 물질”이 아니라,

뇌에게 "이건 중요한 정보야 꼭 붙잡아!" 라고 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ADHD의 실행기능 체계는 이 도파민 조절이 매끄럽지 않아요.


그래서 중요한 정보가 들어와도 "이건 정말 중요한 거야."라는 신호가 강하게 전달되지 않는 때가 많아요.

이런 이유로 뇌가 "이 정보는 중요하다" 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시각적인 자극, 다른 소리, 분위기, 심지어 머릿속 다른 생각같은 다른 자극으로

주의가 먼저 이끌려 버려요.


그 결과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죠.

“수업에서 선생님이 말하는 걸 보고 듣긴 했는데,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

“그때 쌤이 뭐라고 했더라? 빨간색 옷 입고, 손에 커피 들고 계셨는데…”

“11월 10일까지 뭘 내라고 하셨는데, 날짜 앞에 무슨 단어를 말하셨더라?”


즉, 내용(의미)는 흐릿한데 장면과 감각은 또렷이 남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뇌가 “이 말의 의미”보다, “그때의 색, 분위기, 표정”처럼

감각 정보에 더 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에요.

혹은 본인이 들은 말 자체는 또렷이 기억하는데,

누가 말했는지가 기억이 안나는 경우같은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다른경우로는 작업기억의 과부하입니다.

ADHD 뇌는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 용량이 상대적으로 좁은 편인데,

뇌 속으 들어오는 자극은 항상 많고,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과속 중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작업기억이 과부하 상태가 되면,

뇌는 어느 정보를 먼저 잡아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 채

당장 더 강한 자극을 우선 처리해 버려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 친구가 보낸 카톡 알림

중요한 정보 외의 것들이 순간적인 큰 자극으로 뇌에 입력되버릴 경우,

그 순간 들었던 중요한 말, 중요한 약속, 해야 할 일 등은

머릿속 기억칠판에서 쉽게 밀려나 구석으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가 생겨요.

"아 그때 뭔 말 하셨는데.. 그때 교실 시계가 12시 42분이었던 거랑

쌤 표정이랑 쌤이 손에 커피 들고있던 건 기억은 나는데... 그 말이 뭐였지?"


비언어적 기억과 언어적 기억의 엇갈림 — 감각과 언어 사이의 미묘한 틈


ADHD의 기억은 종종 두 개의 다른 언어로 작동합니다.

하나는 그림과 느낌의 언어(비언어적 작업기억),
다른 하나는 단어와 문장의 언어(언어적 작업기억)예요.

이 두 시스템은 원래 서로를 보완해야 하지만,
ADHD에서는 이 둘이 엇갈리거나 한쪽이 과하게 작동하면서
기억의 연결선이 끊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1) 비언어적 기억은 남았는데, 언어적 인출이 막히는 경우


ADHD에서는 비언어적 작업기억이 생생하게 작동하는 반면,
그걸 언어적 작업기억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이 약할 때가 많아요.

즉, 머릿속에는 장면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 그걸 말로 꺼내려 하면 문장이 막혀요.


“그날 교실에서 선생님이 빨간 옷 입고 커피 들고 있었던 건 기억나요.
근데… 무슨 말을 하셨는지가 생각이 안 나요.”


이런 식으로, 이미지는 떠오르는데 단어가 안 붙는 현상이 생깁니다.
이건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비언어적 기억은 작동하고 있는데
언어적 회상(말로 표현하는 기능)이 그 정보를 ‘찾아오지 못한’ 상태예요.


이럴 때 언어적 작업기억이 강하게 작동할수록,
“정확히 말해야 한다”는 인지적 압박이 커져
비언어적 기억이 갖고 있던 감각적 단서들을 더 가려버리기도 합니다.
결국 뇌 안에서 ‘그림은 있는데, 설명이 막히는’ 모순적인 경험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2) 감각·정서 중심으로 저장되어, 시간과 논리가 끊기는 경우


ADHD의 비언어적 작업기억은

‘시간 속의 나’를 붙잡아 두는 기능인데,

이 부분이 약해지면 장면, 느낌, 감각은 남는데,

시간의 흐름과 논리가 끊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날 교실 공기, 쌤 옷, 커피잔”은 또렷한데,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아요.


이건 공부를 덜 해서가 아니에요.
뇌가 정보를 인코딩하고 보관하는 방식이 ‘의미 중심’이 아니라

‘감각·장면 중심’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이에요.


즉, ADHD의 기억은 ‘언어’보다 ‘감각’이 먼저이고,
‘논리’보다 ‘정서’가 먼저 저장됩니다.
그래서 ‘느낌은 있는데 말이 안 되는’ 순간이 잦고,
그 감각이 다시 자극될 때 비로소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해요.


예를 들어,
그때 들었던 노래나 향, 손의 온도 같은 작은 감각 하나가
잠들어 있던 기억을 단번에 깨워버리죠.

이런 이유로

ADHD의 기억은 ‘사라진 기억’이 아니라 ‘감각 속에 숨어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만, 언어화의 회로가 열리지 않으면
그 기억은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뿐이에요.


3) 반대로, 언어적 기억은 작동하지만 비언어적 기억이 약한 경우


가끔은 그 반대의 현상도 일어납니다.
언어적 작업기억은 잘 작동하지만, 비언어적 작업기억의 요소가 약할 때예요.

이럴 땐 “말로는 기억하는데, 실제 장면이 안 떠오르는” 경험이 생깁니다.

머릿속으로는 문장과 정보의 구조를 알고 있지만,
그 상황의 느낌, 표정, 분위기 같은 감각적 요소가 빠져 있어서
기억이 ‘납작하게’ 느껴져요.


예를 들어,
“그날 발표한 내용은 기억나요. 근데 내가 그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교실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전혀 생각이 안 나요.”


이건 언어 중심 기억 회로가 과도하게 작동하고,
비언어적·감정적 요소들이 함께 저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이 ‘의미는 남지만 맥락은 사라진 상태’로 저장된 결과예요.


그래서 이 경우엔 정보를 다시 떠올릴 때,
‘머리로는 아는데 몸으로는 기억이 안 나는’ 느낌이 듭니다.
즉, 기억은 남았지만 경험의 질감이 사라진 상태죠.


ADHD의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단지 서로 다른 두 언어 (감각의 언어와 단어의 언어) 사이에서 길을 잃을 뿐이에요.

그 언어들이 다시 연결되는 순간, 기억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되살아납니다.

그러니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의 기억은 단지 조금 다른 속도로, 조금 다른 길로 돌아오고 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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