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입니다. 근데 방향이 없는.

by 지엔

앞선 글과 이어서 어제 별마음 코치님에게 들었던 내용 중 마음에 남는 또다른 이야기.

"지앤님이 지금 그렇게 불안정한 이유는, 마치 경주마 같아요. 계속 달려. 근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계속 열심히 달려."


이 말씀이 왜 이렇게 기억에 남을까?

이걸 나의 ADHD 실행패턴, 자격지심과 성장욕구의 혼재, 나의 개인적 특성과 연관지어 풀어보려고 한다.


1) 나는 이미 '속도'와 '추진력'을 갖춘 사람이다.

나는 관심이 몰리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고, 몰입하면 누구보다 깊게 들어가는 타입이다.

즉, 달릴 수 있는 힘 기동력 자체는 아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장욕구를 가동시키는 엔진이 매우 강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2) ADHD 의 큰 특징이 "동기 기반 실행력" 이기 때문이다.

ADHD 뇌는 ‘방향 → 계획 → 실행’으로 가지 않는다.

거꾸로, 흥미 → 실행 → 방향 탐색 → 계획 수립 및 정리 순으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히 정립되지 않은 채 힘이 먼저 발동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바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데도 이미 달리기 시작한 상태인 것이다.


또한 ADHD의 뇌는 '어떤 영역은 아주 강하고 어떤 영역은 아주 약한' 불균형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생길 수 있는 현상이 바로 "할 수 있는데 못할 때"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못하는 상황에서는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지""다른사람들은 다 하는데 왜 난.."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반복되는 실행의 실패로 인한 자존감의 타격을 입는다.

반대로 효율이 극강으로 오르는 상황에서는 몰입하면 누구보다 잘하고, 호기심과 흥미 기반 실행력이 매우 높으며, 새로운 시도나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하다.


또한 ADHD인들은 실행기능이 늘 균형잡히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최고 효율을 보이는 반면, 어떤날은 분명 아까까지 되던 게 안된다.

그래서 효율과 능력이 극도로 올를 때는 '나 더 하고싶어! 더 해보고 싶어!' 의 성장욕구가 미친듯이 발현되고,

반대의 상황에서는 '나 진짜 왜이러지. 왜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지' 라는 자격지심으로 빠질 수 있다.

이러한 ADHD의 양극성이 자격지심과 성장욕구의 투트랙을 동시에 만들 수 있다.

특히 자신에 대한 메타인지가 높은 ADHD 인일수록 이러한 상태 차이을 더 또렷이 느껴 감정의 강도가 크다.


게다가 ADHD는 재능형 성장욕구를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장욕구는 "이걸 더 잘 하고싶어." 보다는 "이거 너무 재밌어서 더더 해보고싶어." 라는 호기심을 기반으로 자란다. 그런데 ADHD는 바로 호기심과 흥미 기반의 몰입형 뇌이다. 따라서 호기심과 추진력이 결합되면 곧 행동 에너지로 쉽게 변환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ADHD는 의도치 않은 작은 실패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이기 때문에, 내 내면에는 자격지심의 씨앗도 많이 들어있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생산성, 시간관리, 대인관계, 정리, 계획 및 지속성 등 다양한 실행기능 전반에 걸쳐서 어려움을 반복적으로 겪어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ADHD의 핵심 특성 중 하나가 "내 기대만큼 내 행동이 실행이나 지속이 잘 안되는 경험이 쌓인다."인데,

이 경험이 내면에 자격지심을 조금씩 뿌리내리게 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다행인건 나는 실패에서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패해 왔던 영역이라도 그 상황에서 시도해볼 만한 다른 흥미있는 방법이 있다면 금방 또 흥미쪽으로 끌리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ADHD의 뇌는 흥미가 맞으면 회복도 쉽다. '다시 해보지 뭐!'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도 ADHD로 인한 강점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이 성장욕구에 불을 다시 지피는 불씨가 된다.


3) 자격지심이 방향을 흐리게 하고, 성장욕구가 속도를 밀어붙이고 있다.

나의 현재 마음은 이렇게 그려볼 수 있다.


자격지심과 관련된 마음

: 마음이 조금 쪼그라드는 느낌, 어깨나 몸의 긴장, "나는 해내야만 한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속도가 매우 빨라짐. 급하게 나를 증명하려는 행동, 즉각적인 부정적 자기평가와 부정적 결과로 인한 자존감 흔들림, 마음이 급하고 당장 결과를 보고싶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보여줘야 해,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 과거의 경험을 부끄러워 함


성장욕구와 관련된 마음

: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지가 생김, 잘하는 사람을 보면 위축 보다는 "와 좋다~"의 느낌이 먼저 옴, 몸이 앞으로 기울고 움직일 준비, 이거 재밌겠다는 마음과 호기심, 새로 시도하고 싶은 마음, 배우거나 실험해보고 싶은 충동, 깨졌어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보지 뭐! 실패는 나에게 성공을 위한 또다른 정보다, 방향이 중요해, 요즘 나 성장하네? 나의 가능성을 넓히는 중, 과거도 현재도 모두 과정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방향 없이 속도만 있는 상태가 생겨버린다.


ADHD는 자격지심과 성장욕구의 공존을 강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ADHD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수행능력의 기복, 감정의 민감성, 호기심 기반 동기, 반복된 실패 경험, 빠른 회복력, 높은 창의성, 폭발적 몰입...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이 바로 "나는 부족해(자격지심)"과 "나는 더 할 수 있어. 하고싶어.(성장욕구)"가 동시에 강하게 존재하는 심리구조를 만들어낸다.


4) 나는 목표보다 '과정 설계'가 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목적지를 미리 정하고 뛰는 사람이 아니라, 달리면서 길을 찾아 나가는 특성을 가진 사람이다.

이는 단점일 수도 있지만, '창조형, 호기심형 두뇌'의 핵심 강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다.

"그럼 최소한, 내가 어떤 트랙을 달려야 하는지, 지금 어느 트랙을 뛰고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이게 없어서 불안하다. 내가 말한 '근거 없는 불안'은 사실 방향이 없어서 생긴 정상적인 뇌의 위험경보일수도.


5)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보다는 '방향성 문장'이다.

ADHD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목표'는 너무 추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방향성과 의미가 정해지면 그 목표는 추상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바뀐다.


코치님이 말한 "경주마처럼 달리는데 길을 모르고 달린다."는 것은

내게 이런 말로 들린다.

"지엔님, 속도는 이미 충분해요. 이제 '어디로' 갈지를 명확히 잡으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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