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이 책은 날카롭기도 하고 참신하기도 한데 감정적으로 힘들지도 않다.
소설이나 시 읽기는 매우 정서적인 활동이라서, 나와 잘 맞으면 잘 맞는 대로 나와 잘 맞지 않으면 또 맞지 않는 대로 좀 힘들다. 그래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이 피곤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작가의 르포, 논픽션은 그런 감정적인 어려움이 없다.
3인칭 관찰자(?)로서의 시선으로 당사자들을 인터뷰하기 때문이다.(여러 참사를 다룬 르포는 굉장히 힘들기도 하지만)
기자 출신이라더니 여러 인터뷰 대상들이 폭넓고 그들의 말들이 매우 실감 난다.
그래서 무척 재미있고 몰입하게 된다.
게다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시각.
그런 것들은 독자인 나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작가지망생들이 생각하는 문학상(또는 신춘문예), 취준생들이 바라보는 대기업의 공채, 고3학생들이 생각하는 대학 입시라는 것이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와 같은 시험의 일종이라고 보는 관점.
아, 신춘문예를 취업 시장의 공채와 같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
그런 것을 준다. 그리고 그런 공채 시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결국 그 시험이라는 것이 간판을 따기 위함임을, 간판을 따고 나면(그 성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허무하게도 안주하고 마는 문제점.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들어가고 나서는 그것이 하나의 계급이 되고 너와 나를 구분하는 수단이 되고 마는 문제점.
그런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매우 '절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 모두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라도 패배의 경험이 있을 것이고
또는 모든 것에 성공한 승리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한국 사회에서의 경험은 가슴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계나가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온 재인(지잡대를 나왔다고 말하는)에게 나는 홍대 나왔다고 하는 식의 뿌리 깊은 계급의식)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모두가 남일 같지 않게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구?로 돌아오면
작가는 '정보의 공개'를 말한다.
흔히들 탐욕에 가득 차서 중소기업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그 중소기업의 연봉과 복지 수준을 공개하자는 것이다.
법조계의 전관예우 같은 것을 비판만 하지 말고 변호사의 승소율 같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자는 것이다.
문학상의 깜깜이 심사만 말하지 말고 독자들이 다른 독자들의 평을 보고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평론가나 문학상이라는 간판 말고) 제3의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공채라는 것이 공정성이라는 크나큰 장점이 있지만 공채 말고 다른 길로도 이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맞는데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그래서
내가 읽은 이 작가의 책들('한국이 싫어서(소설)', '먼저 온 미래(르포)', '당선, 합격, 계급(르포)')은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태산명동에 서일필,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에 가봤더니 나오는 것은 쥐 한 마리.
매우 재미있게 허겁지겁 읽고 나면 나중에 약간의 허무함?
그런데 작가가 이야기하는 세상사에 어떤 결말이 있을 수 있겠냐? 하면 딱히 또 할 말은 없다. 작가 또는 기자란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문제 제기를 이 정도의 몰입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기자 출신 작가로서 뛰어난 성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카뮈 형도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으로 부조리주의를 이야기하지만, 그게 또 음청 추상적이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