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은 대작가이다. 교과서에 실린 '장마'라는 작품은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배웠을 것이다.
아무리 미남 미녀라도 남편과 아내가 되면, 그만 익숙해진다는데 윤흥길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그런 느낌이다. 모두 읽어본 것도 아니면서 어느덧 익숙하게 느끼고 돌아보지 않은 느낌(?)
그래서
시쳇말로 요즘 잘 나가는, 핫하다는 작가들의 문장에 질린다 싶을 때(그렇다고 엄청나게 책을 읽는 것도 아니지만),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황혼의 집, 이 책은 단편 소설집이다. 1976년에 출간되어 거의 50년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6.25를 겪은 세대의 근원적 공포 같은 것이 매우 감각적이고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준 느낌을 뭉뚱그려 말하라면 '폭력과 공포'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지나간 시대를 관통하는 열쇳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황혼의 집, 집, 장마, 어른들을 위한 동화, 타임 레코더, 제식훈련 변천약사, 몰매, 내일의 경이, 이 여덟 편의 작품에서 많거나 적거나 나타나는 것은 폭력이다.
그 중 '황혼의 집'에서 드러나는 모습.
개미들은 경주의 겨냥에 걸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타 죽어갔다. 죽은 개미의 수가 자꾸 불어날 때마다 경주의 잔미운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운 장난에 끼어들기를 처음엔 나는 무척 꺼렸다. 그러나 불행한 개미들이 끈덕지게 뒤쫓는 화경의 초점을 벗어나려고 허겁지겁 풀잎 사이로 숨고 정신없이 내빼다가 끝내는 잘쏙한 허리를 배배 꼬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붙이며 우습게 죽고 마는 그 모양에 차츰 어떤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벌써 해 질 녘이었다. 할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던 우리에게 어느새 하루가 다 갔음을, 그리고 낮과는 다른 또 하나의 어둡고 끈적끈적한 세계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음을 퍼뜩 일깨워주었다. 길 건너 맞은바래기에 있는 우리 집 지붕 위로 붉게 물든 한 덩어리의 구름이 서서히 미끄러져가는 모양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주가 별안간 화경을 팽개쳤다.
"죽여버려야지, 죽여버려야지......." 하고 뇌면서 경주는 쏜살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뛰었다. 뛰면서 생각해 보니 경주는 맨손이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경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까지 나는 경주가 제 어머니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애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경주네 어머니는 어른이다. 늙었다곤 해도 맨손 가지고는 아무래도 좀 어려울 것 같았다. 그 점이 불안해서 나는 속으로 안달을 했다. 끄나풀! 나는 줄곧 부드러운 끈만을 생각하면서 헐떡헐떡 뛰었다. 아버지가 쓰던 헌 명주 넥타이라면 아주 안성맞춤이리라. 거의 주막 앞에까지 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경주를 불러 세웠다. 나의 숨 가쁜 설명을 듣고 경주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칼날 같은 손톱이 나의 눈두덩을 할퀴고 쥐어뜯었다.
"경옥이냐?"
방 안에서 목쉰 목소리가 나직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그 순간, 나는 엉겁결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할멈은 철사처럼 뻣뻣한 흰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뜨린 채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문설주에 의지하고 서 있었다. 나는 할멈의 추악한 몰골에 질려 몸서리를 쳤다. 고름이 떨어져 달아나 뻐끔히 벌어진 저고리섶 새로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유방이 보였고, 흰지 검은지 모를 치마는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얀데 여기저기 할퀸 자국이 끔찍했고, 눈두덩은 퉁퉁 부어 있고, 눈곱에 싸인 빨간 눈알은 말라붙은 눈물의 흔적 위에 새롭게 비어져 나오는 눈물로 입 안에서 녹아버린 사탕처럼 질척거렸다. 그런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할멈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어둠침침한 방 안에서 경주가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경주는 어머니를 밀치고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그때까지 비틀거리며 걸음조차 제대로 못 하던 할멈이 갑자기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랜 동작으로 딸의 머리채를 나꾸었다. 그리고 역시 믿어지지 않는 무서운 힘으로 딸의 몸뚱이를 번쩍 안아 올려 방구석에 처박았다. 경주는 재차 뛰어나왔다. 그러나 다시 붙잡혔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경주는 네 차례 뛰어나왔고, 모두 네 차례 방구석에 던져졌다. 나는 재빨리 문밖에 나와 죽을힘을 다하여 집으로 도망쳐왔다. 할멈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어딜 가. 에미를 놔두고 어딜 가, 이년!"
평론가 정호웅은 황혼의 집에서 나타나는 그 경주 어머니(별명은 할멈)의 울음에 대해서
물론 독자는 그 울부짖음과 살의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해방 전에는 잘살았지만 해방 후 가진 것을 부당하게 다 잃고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 경주의 오빠가 산사람이 되어 죽음의 길을 헤매고 있다는 것, 경주의 큰언니가 그 동생을 살리려 나섰다가 협잡군에게 걸려 몸을 더럽히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목매 죽었다는 것, 경주의 작은 언니는 이런 상황을 못 견뎌 헤매다 가출하고 말았다는 것 등이 그것들의 원인임을 소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소문의 조각들을 꿰맞추어 어림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울부짖음과 살의가 소설의 육체의 뒷전에 놓여 흐릿하다.(정호웅, 작품 해설)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만
나는 '너무 무서운데 왜 이렇게 무섭지?'라는 의문에 '소설들의 전반을 꿰뚫는 폭력의 화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 보았다.
나만해도 어릴 때 어느 정도의 일상적 폭력을 겪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얼얼한 귀싸대기의 공포, 대걸레 자루가 궁둥이에 몰고 올 아픔에 대한 공포, 학교를 다니면서 군대를 다니면서 이런 경험을 해보았다면
그리고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도 선생이나 상급자의 험악한 표정, 곧 날아올 주먹의 신호가 보이는 순간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듯 비어져 나오는 공포.
그런 숨 막히는 공포감을 자극하는 소설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폭력이 일상인 시대의 끄트머리를 살아왔고
일선 학교에서 체벌이라는 이름의 육체적 폭력이 사라진 시대를 겪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가끔 스멀스멀 올라오는 폭력의 간편함, 깔끔함 따위를 동경하는 마음이 솟구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폭력과 공포
그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들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