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양귀자)

by 궁금하다


발표된 것이 이미 20년이 넘었다.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00만권 이상 팔렸다.(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주인공 안진진을 해석할 때 그것이 현재의 시대적 흐름과 맞기 때문이라고, 20-30대 여성의 취향을 저격한 것이라 말하기도 하더라만)


어쨌거나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또는 의도에 동의할 수가 없다. 작가는 '인생은 모순이고 이 모순적인 삶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하는 과정이야말로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여기까지는 뭐 그런대로) 그 선택의 내용을 내가 동의할 수가 없다. 작가는 구질구질한 현실적 삶과 윤택하고 평온한 삶,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이란 엉망진창이고 쓰레기 같지만 참으로 인간적인 삶처럼 서술하고 있다. 또한 윤택하고 평온한 삶이란 겉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지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은 안진진이 김장우를 버리고 나영규를 선택하는 것은 뭔가?


작가는 엄마의 지긋지긋한 불행과 생활력을 말한 후 이모의 완벽에 가까운(또는 평화로운) 생활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은 이모가 자살에 이르게 한다. 이게 뭐냐?


이게 인생이라는 건가?


이 소설은 경쾌한 주인공 나의 어느 날 아침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 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한 번만 더 맹세코,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다면, 평소의 나는 이런 식의 격렬한 자기 반성의 말투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열혈한을 만나면 지체없이 경멸해 버리고 두 번도 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나였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아침,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부르짖었다. 내 인생을 위해 내 생애를 바치겠다고.


뜬금없는 소설의 시작, 안진진의 도발적인 등장.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선은 아버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치욕에 예민했고, 자신에 대한 모독을 가장 못견뎌한 사람이었다고. 이 진술만큼은 오류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기까지는 진실이다,라고 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나면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는 술꾼이라 불렀고, 누구는 또 건달이라고 칭하였으며 혹자는 가끔 성격 파탄자로 규정하였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지금은 주민등록 등본에 ‘행방 불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에 대해.

끝내 그 말을 숨기고 있었던 아버지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부드럽고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술에 취하면 실패한 탈옥수의 저항을 유감없이 보여 주며 사는 길을 선택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자신이 일몰에 돌아오는 이유를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버지 말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잔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 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아버지는 술꾼, 건달, 성격 파탄자로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신비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아내를 때리고 자식들을 내팽개쳤다. 그것을 '아내와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거기에 송두리째 자신이 갇히는 것이 싫었던 자유로운 영혼'처럼 이야기하면 곤란하다.


다음은 김장우


김장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희미한 선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자칫 김장우라는 인물의 뚜렷하지 못한 성격이나 별다른 특징 없는 외모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김장우의 사람됨은 그 반대쪽에 있다. 김장우는 의외로 강한 성격이며,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곧 눈에 뜨일 만큼 호리호리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선량한 미소와 눈빛을 사람들은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편이었다.


이유야 또 있지. 안진진이 있잖아.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같이 웃어 주고 쉴새없이 숨소리를 내는 안진진이 있어서 순간순간이 충만할 텐데 뭣 때문에 카메라를 가져오겠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랑하는 꽃이름을 불러 주는 대신 안진진의 이름만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했어.


김장우는 순진하고 착하다. 생활력이 부족하고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안진진에게는 그것이 매력이다.


다음은 나영규

나영규는 매사에 계획적이고 철저한 사람이며 소설에서는 이모부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채근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영규는 더 이상 나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상상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여자들이 결혼을 결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3개월은 걸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평균적이든 아니든 나 또한 그 이상 끌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명료해지리라. 이미 아주 많은 부분이 명료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벌써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나영규에게 해야 할 대답이 무엇인지 윤곽은 잡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깊은 밤, 나영규와 전화를 하고 있으면 문득 이 남자와도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를 사로잡곤 했다.


그리고 일란성 쌍둥이인 엄마와 이모


엄마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당장 눈에 거슬려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머리 스타일이었다. 어머니의 머리에서는 아직도 심하게 퍼머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게다가 앞도 뒤도 없이 무작정 튼튼하게 웨이브만 살려 놓은 촌스러움이란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적당히 풀어져서 어수선하기만 했던 아침의 머리 모양대로 있어 줬다면 내 마음이 이토록이나 참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는


그 해 5월의 스승의 날, 5학년 3반 학부모 특별수업을 맡은 일일교사 중의 한 사람은 나, 안진진의 어머니였다. 날렵한 비둘기색 투피스, 세련된 머리 스타일, 환한 웃음을 머금고 교실에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아이들은 일제히 소리질렀다.

“와--.”

그 고함은 어여쁜 처녀 교생 선생님이나 나타나야 발생하는 일종의 탄성이었다. 그만큼 나, 안진진의 어머니는 히트였다.

아직도 그 애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고백하자면 그 해 5월, 히트한 엄마는 어머니가 아니고 이모였다. 어린 나는 머리를 쥐어짜다 쌍둥이 이모를 떠올렸고, 이모는 하룻동안 안진진의 엄마 노릇을 하는 일에 대해 무지무지하게 재밌어했다.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 하고, 말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결국 김장우와 나영규, 엄마와 이모는 '나'의 삶에 있는 선택지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나' 안진진의 선택을 보여준다. '나'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영규와 결혼하고, 우아하고 품격 있는 이모는 소설의 말미에 자살해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나는 젊었을 때 후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선배는 참 좋은 사람이지만 결혼 상대는 아닌 것 같아요.(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이거 되게 익숙한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전형적인 궤변, 자기 변명,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클리셰 아니냐? 주인공 안진진은 사랑하는 김장우와 결혼하지 않고 왜 이모가 죽음으로 가르쳐 준, 지루한 삶 속으로 기어들어가냐 말이다.


이거 결국은 부유한, 안정적인 남자를 선택하는 여자의 자기 변명 과정.

장대한 빌드업의 과정이 아닐까?


뭐라고 딱 꼬집에 말하기 어려운 내 꿀꿀한 기분의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결혼 적령기 여자분들에게 전하는 가슴 따뜻한 위로.


그리고 구글에다가 '양귀자 재산'이라는 검색어를 넣어 보았다. 작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나?(물론 그런게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과몰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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