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하재영)

by 궁금하다


예전에 전설적인 인터뷰가 있었다(브리지트 바르도와 손석희의).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하, 벌써 20년이 넘어버린 사건이었다.(2001년) 그때의 나는 '영 정신 못차리는' 할머니를 우리 손석희 씨께서 제대로 교육시킨, 시원한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 "한국 같은 문화국이 왜 개고기 같은 야만적 음식을 먹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립서비스를 했지만 손석희의 "한국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라는 질문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온 책을 봤다"는 동문서답을 했고, '개고기=식인문화', 개들 중에서 애완용 개와 식용 개를 구분하는 것은 인종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정신 아득해지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에 "프랑스에선 소고기를 먹지만 인도인들은 소를 신성시한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프랑스인들에게 소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소는 먹으라고 있는 거지만 개는 우리의 친구라고 이중잣대를 들이댔다.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은 얼마든지 야만인으로 매도당해도 싸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하여 손석희가 "말을 해도 못알아 들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는 투로 탄식하게 만들었다. 손석희가 "국내에 거주하는 유럽계 외국인 중에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그 사람들은 분명 속은 거다. 백인이 개고기를 먹을 리 없다" 등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더니 그냥 끊어 버렸다. 결국 손석희가 "동물애호가라기보다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이 인터뷰는 손석희에게 상당히 인상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시선집중 7주년 기념 행사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인터뷰 대상을 다그친 사례로 브리지트 바르도를 들기도 했는데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말이 안 통하는 사례였다고 밝혔다.(나무위키)

게다가 제목인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라는 말도 심각하게 오류라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순수', '맑은 영혼'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개, 아이,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할 때가 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냐 싶었다. 그 순수한 잔인함이란.......


또한 나는 유난 떠는 것이 싫다. 그 왜 홍은전의 책에 나오는 동물보호 단체 사람들이 도축장 철창 앞에서 흐느끼고 하는 것 말이다. 도대체 어쩌라고? 왜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지 못하는가. 나는 작가의 순수함, 선량함, 이런 것들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강변하고 싶었다. 나는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없냐"라고 말하고 싶었고, 왜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냐고 "요 맹추야"라고 타박하고 싶었다.

이것이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나의 생각이었다.

저번에 홍은전의 책을 읽은 후에도 나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홍은전을 읽고서도 "그저 이런 양반도 있군,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군" 정도라고 할까?

사람은 책으로 배우는 게 정말 어렵다는데 내가 딱 그짝이다.


한마디로 이책은 무척 감정적인 데다가 동시에 굉장히 논리적인 책이다. 가슴 아픈 묘사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기도 하고 여러 증언과 인터뷰, 참고 자료의 인용은 마치 논문처럼 건조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이 어떤 내용이냐면, 개를 시작으로 해서 동물들의 참상을 보여주고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로 나아가는 그런 내용이다.


나처럼 피피도 소유에 대한 개념이 있었고(자신의 방석과 장난감과 간식을 결코 뺏기지 않으려 한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했고(내가 피피의 발톱을 깎다가 피를 낸 이후 10년째 발톱깍이만 꺼내면 도망을 간다) 두려움을 느꼈고(동물병원에 데려갈 때마다 피피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린다) 쾌락을 추구했다(산책을 가거나 놀이를 할 때 피피의 꼬리는 맹렬하게 흔들린다).


(팅커벨 프로젝트 황동열 대표) 어떤 사람들은 반려견, 유기견, 식용견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죠. 내가 가장 나중에 입양한 순돌이는 유기견이었던 동시에 식용개가 될 뻔했던 애예요. 구리시의 한 동네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가족들이 순돌이만 버리고 이사를 갔는데, 동네 남자들이 혼자 남은 애를 잡아먹으려고 올무를 설치한 거야. 순돌이 허리가 올무에 걸렸는데 그 안에서 살아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허리는 거의 잘릴 지경이 되고 생식기는 표피가 다 벗겨져서 시뻘건 살덩이만 남아 있었어요. 그런 상태로 혼자 헤매다가 이번에 차에 치여서 뒷다리가 다 부서졌어. 구조 후엔 결국 다리를 절단했어요. 허리가 끊어지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탈출하지 못했다면 얘는 어디 야산에서 목매달린 채 맞아 죽었겠지. 순돌이만이 아니에요. 우리 집에 있는 다른 애들도 비슷해요. 시추 순심이는 주인이 있었지만 개소줏집으로 넘겨지기 직전에 구조되었고, 믹스견 럭키는 동작대교 밑에 버려진 뒤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사람들로부터 숱하게 도망다녀야 했어요. 백구인 흰돌이 흰순이는 처음부터 식용견으로 태어났고요.”


(엘로우 독 프로젝트 팀 사진 작가)촬영은 못 하고 목격만 한 적도 꽤 있습니다. 하아, 너무너무 끔찍한 일들을 많이 봤어요. 안성이었나… 촬영은 못했는데 거기서 정말 잔인한 걸 봤습니다. 그건 정말…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아주 작은 시추였어요. 그 개농장에 있던 개는 아니고 누가 잡아달라고 데려온 개였어요. 그 시추를 가마니 같은 데 집어 넣더니 끝부분을 꽁꽁 묶어 버리는 겁니다. 개가 못 나오도록. 그런 다음에 창처럼 생긴 길고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가마니를 푹푹 쑤셨어요. 아주 깊이. 그럼 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몸이 창에 막 찔리는데 가마니 안에서 꼼짝도 못하는 겁니다. 급소를 찔러서 바로 죽이는 것도 아니에요. 몇 번 찌르고 나면 본인들도 더 찌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요. 찔려서 죽는 게 아니라 출혈로 죽는 겁니다. 시추는 가마니 안에서 발광을 하고 피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힘이 빠지고 피가 빠져서 천천히 죽어갔어요.


이밖에도 끔찍한 묘사와 증언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어쩌랴 싶을 때, 이 책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예를 들어 개식용을 찬성하며 “소, 돼지, 닭은?”이라고 묻는 사람들은 모순된 현실(개와 고양이는 사랑받고 소, 돼지 닭은 착취당하는 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쪽을 그릇된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농장동물의 착취를 비판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그가 육식을 한다면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농장동물이 당하는 가학 행위에는 침묵하는 반면 개식용에 반대하는 사람은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그들이 의식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왜 개만 이야기해?”라는 질문의 본질이다. 개로 시작하든 고양이로 시작하든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우리의 일상이 동물의 고통을 전제한다면 고통받는 동물의 종 따위는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무엇보다 동물과 관련해 완벽한 실천주의자가 되지 못할 바에는 실천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편이 차라리 일관성 있다는 입장이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동물의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의 저자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사람들이 동물을 아예 먹지 않거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윤리적 영역에는 결코 적용하지 않을 사고방식이다. 항상 거짓말만 하든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바로 이 “전부 아니면 전무”를 자격의 기준으로 삼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동물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개식용을 반대할 자격이 없다. 가족 제품을 사용한다면 모피를 반대할 자격이 없다. 일관성 있게 소비하거나 일관성 있게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전부 아니면 전부라는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일관성을 강요한다. 그러나 일관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기를 부여하는 것, 시작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이 말들은 명확하게 '나'를,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향하고 있다. 성기게 몇 부분을 인용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그래서 변명하고 또 변명했다. 그리고 결국 다 읽고 나서야 '배떼지에 기름이 껴서 이러는 거지'. '작가의 순수한 어리석음' 같은 나의 고정 관념은 깨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하는 시대가 아니지 않는가. 난리통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축사의 화재 사건에 '통돼지구이 맛있겠다'라는 댓글이 얼마나 천박하고도 잔인한 인식을 드러내는 말인지, 내 스스로가 개를 도시락에 비유하며 낄낄거렸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가를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제는 친구들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했을 때 그것이 옳지 않다(이미 개식용이 금지되었지만)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라는 것도 단순히 '선량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의도치 않게 희생되고 있는'의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에 생각이 미쳤고 게다가 '작가의 순수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나 자신의 "답없는 멍청함"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개로부터 시작해서 공장식 축산시스템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야 될 때라고, 비록 브리지트 바르도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개식용을 야만시했던 것 자체만으로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현듯

사람의 생각, 고정관념(구체적으로는 꼰대인 '나'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도대체 몇 권의 책과 경험이 필요할까?
한숨을 쉬면서 요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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