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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무척 참신한, 그리고 매우 익숙한

by 궁금하다


1. 무척 참신한


오.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소설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SF소설인 만큼 소재들이 매우 참신했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들에서 자주 접해보지 않았던 소재들(내가 SF소설을 많이 보지 않아서인가? 싶기도 하지만)이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인간배아를 완벽하게 디자인하는 바이오해커 디엔), 스펙트럼(우주 탐사를 떠났다가 실종되어 40년 동안 태양계 바깥의 행성에서 떠돌다 발견된, 외계 지성 생명체와 조우한 여성 생물학자 희진), 공생 가설(미지의 타자인 외계 생명체가 우리의 몸속에 깃들어 사랑, 윤리, 이타심과 같은 가치를 가르침),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우주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해진 시대에 슬렌포니아라는 제3행성에 가기 위해 100년 넘게 우주 정류장에서 혼자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는 170세 노인 안나), 감정의 물성(감정을 화학적으로 조형화한 제품), 관내분실(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우주 터널을 통해 외계 행성 여행을 하고자 신체 개조에 돌입하는 48세 동양인 여자 비혼모)


이런 소재들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야. 요것 참 참신하구나.

과학 관련 책들에서 보았던 단어들을 소설에서 자연스럽게 발견하는구나.

작가가 포스텍 출신이라는 후광 때문에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또한 낯 선 소재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고 대중의 이해 수준을 고려한, 대중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딱 적당한 수준.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고,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후반부의 작가의 말에서 각 작품마다의 창작 계기 등을 밝혀 놓았는데


언젠가 도서관 안에서 책이 분실되면 찾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 메모에 '관내분실'이라는 제목을 달아둔 채 잊고 있었다. 공모전 마감을 앞두고 메모를 보며 구상한 글이 '관내분실'이다. 인간의 마음을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다는 발상은 SF에서 아주 흔히 쓰이는 소재이지만, 데이터의 분실을 실제 세계에서의 분실과도 연결 지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세상 어딘가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과 같은 이야기로 완성되었다.(관내분실)


이런 식이다.


간단한 아이디어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소설가, 이야기 꾼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2. 매우 익숙한


단편 소설집인 만큼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서술자인 '나'는 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30대 초반인 작가의 모습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을 듯)

이미 눈치챘겠지만 각 소설들의 주인공이거나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인물들은 여성 바이오 해커, 여성 생물학자, 여성 연구원, 여성 우주 비행사, 감정을 물질로 소유하고픈 여성, 임신을 한 후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자 '마인드' 도서관을 찾는 여성, 48세 여성 비혼모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여성의, 특히 30대 초반 여성의 고민을 다룬다. 아주 어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성의 제도권에 완전히 편입된 상황도 아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고민이 많고, 필연적으로 모호하다. 모호한 것이 뭐가 문제냐?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내면의 진정성과 비대한 자아, 바로 이것과 통하는 요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인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건 단지 재현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느 쪽을 믿고 싶은 걸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민은 한 발짝 다가섰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던 은하가 마침내 지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민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정적이 흘렀다. 은하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지민의 손끝을 잡았다.(관내분실)


엄마와 딸 사이에 갈등과 화해, 그 미묘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그래서 좀 짜증도 난다) 그리고 많이 봤던 익숙한 것들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거기에 재미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3.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요즘 핫하다는 작가, 장류진을 다시 떠올린다.

장류진과 김초엽은 모두 학벌도 훌륭하고 나이도 젊다.

이들은 마치 고등학교에서 만나는 문과 1등과 이과 1등 같은 느낌이다.

이과 1등은 애가 착하고 성실하고 진지한데 좀 재미가 없다.

문과 1등도 착하고 성실하지만 영악하다.


나는 문과 1등이 더 좋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취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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