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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

by 궁금하다

있어 보이는 책.(나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카뮈가 좀 더 나이 들어서 죽었다면 M자 탈모가 더 진행되어 대머리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은 읽기가 쉽지 않은 철학 에세이에 관한 반감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에게 강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바로 첫 구절 때문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니체니 칸트니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 이외의 포유동물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곤충들이 있을까? 그야말로 쓸데없는 이 따위 생각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리고 엿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나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형벌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카뮈 형은 나에게 답을 준다.


카뮈 형은

우선 부조리에 대해서 말한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도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p28)

이와 같은 식으로,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p29)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p30)

어떤 때 거울 속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는 그 이방인, 우리 자신의 사진 속에서 다시 보는 친근하면서도 불안스러운 형제, 이것 또한 부조리다.(p31)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지성도 그 나름대로 내게 말해준다. 그에 반대되는 맹목적 이성이 모든 것은 명확하다고 제 아무리 주장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p38)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만이라도 '분명하게 알겠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p47)


그러니까 한마디로 세상은 부조리하다. 우리의 이성 따위가 변치 않는 진리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어렵게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세상은 엿같다.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나의 인식과 세상의 존재형태가 일치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놈들은 벌을 받는, 그런 것은 없다. 그저 반복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삶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자살이고 또 다른 하나가 철학적 자살이다. 자살은 세상 자체를 없애버리는(죽어버리는 내 입장에서는) 것이고, 철학적 자살은 뭔가 합리적이고 변치 않는 것을 원하는 내 인식을 없애버리는 것이다.(예를 들어 종교 같은 것. 그냥 믿어버리면 된다) 여기에서 카뮈 형은 반항, 자유, 열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사실 자살과 철학적 자살은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말이다. 카뮈 형은 자살과 철학적 자살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을 살아갈 어떤 명백함을 원했다.


나는 결코 모른 체할 수 없는 몇 가지 자명한 사실들을 거머쥐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확실한 것, 내가 부정할 수 없는 것, 내가 버릴 수 없는 것, 바로 이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불확실한 향수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몫을 송두리째 다 부정할 수 있어도 이 통일에의 욕구, 답을 얻고자 하는 이 열망, 명백함과 수미일관함에 대한 이 요청만은 부정할 수 없다.(p79)


그리하여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반항은 한순간 한 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다.(p83)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p84)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 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자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p84)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 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거부를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p85)


밑바닥 없는 이 확실성 속으로 몰입하는 것, 이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충분하리만큼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느낌으로서 그 삶을 확장시키고, 연인처럼 근시안이 되지 않은 채 삶을 두루 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떤 해방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을 담보로 한 수표를 끊지 않는다. 그러나 독립은 '자유'라는 온갖 환상들을 대신한다. 그 환상들은 모두가 다 죽음 앞에서 무효가 되고 만다.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 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할 수 있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p91)


그와 같은 세계 속에서의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91)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만을 통해서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p96)


그리고 나서 카뮈 형은 부조리한 인간의 예시로 돈 후안, 연극의 배우, 정복자들 든다.

예를 들어 돈 후안은


부조리의 인간은 시간을 벗어나지 않는 인간이다. 돈 후안은 여인들을 '수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최대한으로 상대하며 그 여자들과 더불어 삶의 기회를 남김없이 소진한다. 수집한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먹고 살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돈 후안은 희망의 또 다른 형태인 회한을 거부한다. 그는 초상화들을 바라보며 즐길 줄 모른다.(p111)


즉 돈 후안과 배우와 정복자는 시간 안에서, 무대 안에서 최대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예술이다.


'부질없이' 작업하고 창조하는 것, 진흙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것,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자신이 만든 작품이 하루 사이에 부셔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수세기에 걸친 장구한 미래를 위하여 건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무 중요성도 없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조리의 사고가 가능케 해주는 어려운 예지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찬양하는 이 두 가지 사명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에게 열려진 길다. 그는 공허를 자신의 색채로 물들여야 한다.(p174)

통일은 포기하는 모든 사고는 다양성을 앙양한다. 그리하여 다양성이야말로 곧 예술의 보금자리이다.(p177)

이렇듯 나는 내가 사고에 요청했던 것, 즉 반항과 자유와 다양성을 부조리한 창조에 대해서도 요구한다. 부조리한 창조는 그후 자신의 깊은 무용성을 나타내리라.(p178)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압축해서 카뮈 형은 시지프 신화로 보여준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p186)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의 연속을 응시한다.(p188)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 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된다.(p189)


그렇다. 카뮈 형은 내가 답을 주었다. 자살은 별로다. 종교도 좀 아니다.

네가 세상이 부조리함을 인정하고 결국 가장 큰 부조리인 죽음마저도 인정한다면 자유를 얻을 것이요. 남은 삶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열정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러면 너는 오히려 행복하게 될 것이다.

저 시지프처럼.


이게 내가 읽은 시지프 신화다.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고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화나고 짜증 나지만 인정하자. 카뮈 형이 그러잖아. 삶이 부조리한 거라고. 그래, 인정하자.

그리고 또 어차피 나는 죽는다. 어떤 절대적인 권위나 종교적 교리는 믿지 않는다. 그럼 나는 행동의 자유를 얻는다. 행동이랄까? 생각이랄까? 어떤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후회도 하지 말자. 그냥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고 싶은 생각을 맘껏 하자.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자유롭게 맘껏, 되는 대로 살자. 나의 남은 생을 남김없이 소진하면 된다. 열정적으로

그러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저 시지프처럼.


이것이 요 며칠간의 나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머리를 쥐어뜯었던)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다.


이 책을 한창 집중해서 읽을 때는 세상의 비밀을 깨우치는 것 같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명확히 제시해 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게다가 세상이 엿같다고 이야기해 주는 형이 있어서 참 괜찮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카뮈 형의 대답은 고맙다.

고맙긴 한데......

그래도 성의껏 대답해 준 것 같아서 고맙긴 한데.......


아직 나는 내가 왜 사는지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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