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발전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역사가 도전과 응전의 반복인지도 나는 모르겠다.
다만 세상만사가 그냥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뭔가가 이루어지려면 원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역사,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과거의 어떤 계기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 과거부터의 흐름을 살핀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 삶에 대한 이해를 줄 수도 있겠다 싶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 아니 나에게 펼쳐 보이고자 했던 것도 그런 것 아닐까?
지금의, 그러니까 21세기의 우리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런 역사의 흐름 속에 지금 우리도 함께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조금 뜬금없지만 흔히들 이야기하는 '대하 역사 소설'에서 대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소설 하면 나는 '토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토지'하면 나는 황톳빛의 강물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품고 흐르는 너른 강.
작가는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닐까?
할아버지 강치무, 아버지 강천동, 나 강재필로 이어지는 삼대에 걸친 이야기.
그것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의 고통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강물은 지천에서 흘러 들어온 온갖 것들을 받아 안고 말없이 흐른다.(소설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731부대, 한국전쟁, 산업화, 도시 빈민, 건설 비리, 조폭의 이권 싸움 등 현대사의 거의 모든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강재필의 누나가 1979년 YH사건 때 투신하다 장애인 신세가 됐고, 누나의 남편이 도시 변두리의 교회 전도사라는 설정까지......)
이 소설의 서술자인 강재필, 즉 나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거구의 건달이다.
쓰레기 같은 아버지 강천동의 체구와 힘을 받았지만 아버지 강천동의 만행을 견디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바로 이 강재필이 교도소에서 출소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재필은 나 사장(자신이 감옥에 가게 된 납치 협박 사건의 배후)에게 의리를 지킨 덕에 출소 후에도 그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강재필은 범죄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고향인 밀양으로 향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아버지 강천동의 개 같은 삶.
울산을 거쳐 밀양에 온 강재필은 할아버지 강치무의 삶을 조사하기 시작한다.(감옥에서 자신의 정신병에 대한 고민 끝에 이런 정신병의 유전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고 그를 제대로 조사하면 자신도 이 정신병에서 놓여날 것이라는 생각에)
강치무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했으나 마침내 일제에 사로잡혀 죄수가 된다. 그러다가 체구가 크고 힘이 좋은 그에게 호감을 가진 일본 군인 덕분에 731부대의 보초 역할로 살아남았고 광복 이후에는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리고는 옥고를 치른 끝에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게 된다. 여기까지 조부의 삶을 조사한 강재필은 나 사장의 부탁으로 나 사장 라이벌인 조 사장을 테러한 후 한국을 뜬다.
이 소설에서 나(강재필)의 아버지 강천동은 멀쩡한 처녀를 겁탈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고, 개 장수로 동네의 개를 도살하며 공동묘지의 입구에서 가난한 장례객들의 돈을 뜯는다. 그리고 말년에는 백치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조부 강치무는 한 때 독립군으로 활약할 때가 있었지만 살기 위해서 일제의 개가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모진 고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731부대의 보초원이 되었다. 생체 실험의 희생양이 되고 만 동지의 목숨을 끊어준 후에 그는 일제의 개가 된 것이다.
작가는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우리 현대사를 아우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각각의 이야기는 그렇게 긴밀히 연결되지 않는다.
작가는 세 인물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 아버지 강천동은 나 강재필의 회상을 통해서
조부인 강치무는 과거의 행적 조사를 통해서
이야기를 엮어냈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까지 함께 꿰매어 놓았다.
그러나 건달이 자신의 병증의 원인을 찾는다며 고향으로 내려가 도서관에 박혀 조부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나?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마침 고향의 동창생이 도서관의 계장이고 그가 도서관의 빈 사무실을 집필실로 내어주는 것이 설득력이 있나?
조부가 변절하여 731부대의 보초가 된 것은 극한의 상태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은 그야말로 친일 보수 세력의 논리와 같지 않은가?
나는 문제는 리얼리즘이고 리얼리즘이란 설득력이라 생각한다.
악귀 같은 강천동의 삶, 그것이 보여주는 삶의 비루함.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작가는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았나?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