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아마 대학생 때가 아니었나?), 이 소설을 읽은 나는 질문이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계속해서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었던 듯하다.
이 사회에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모두 좋은 자리(돈 많이 벌고 대접받는 직업?)를 차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차라리 몇 그램의 소마(신경 안정제 같은 약물, 더구나 부작용이 없다!)로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왜 문제인가?
그게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해서 더 나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왜 모두에게 돌아갈 수 없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서로 그렇게 싸워야 하는가?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었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런 세계는 멋지지 않다고 명확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명하다. 어쨌거나 태어날 때부터 결정지어진 것과 태어나고 난 이후에 선택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굉장히 희박한 기회라고 하더라도 기회조차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 있는 미래의 런던은 디스토피아라고 하는 것이 맞다.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2년에 올더스 헉슬리가 쓴 반유토피아적 소설로, 미래의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때의 ‘멋진 신세계’란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계급으로 제조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험실에서 인공부화된 인물들로 그들은 부모도 알지 못 한 채 양육된다. 사람들에게 있어 결혼과 출산은 미개한 생활방식으로 취급되고, 이들은 사람들은 '소마'라는 약과 유희로서의 섹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멋진 신세계〉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만들어낼 세계의 모습은 결코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아닌 디스토피아적 세계, 즉 반지성적이고 물질적인 사회공동체임을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작품이다.(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Daum 백과)
즉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계급(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은 정해져 있고 정해져 있는 계급에 따라 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사회는 안정되고 개인은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계급, 이것을 현대인이라면 누가 찬성할 수 있겠는가?
현대인들 중 누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는 자신의 계급에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겠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옳지 않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떨까?
"자, 이것이 바로 진보라는 것이야. 노인도 일하며 노인도 이성과 교합하며 노인에게도 시간이 없게 되었지.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여가가 없으며 잠시도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지. 또한 불행히도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미한 시간의 터널이 입을 벌린다면 항상 소마가 대기하고 있는 거야. 유쾌한 소마가 있지. 주말에는 반 그램, 휴일에는 일 그램, 호사스러운 동방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이 그램, 달나라의 영원한 암흑 속에서 잠자고 싶으면 삼 그램. 그곳에서 돌아오면 시간의 터널을 빠져 저쪽 편에 와 있게 되는 거야. 매일매일의 노동과 기분전환이라는 견실한 대지에 안착되는 것이지. 촉감영화로부터 다른 촉감영화로, 이 여자로부터 탄력 있는 여자로, 전자 골프 코스로부터 다른......"
나라면
이러한 행복을 선택하지는 않을까?(아니 선택할 수 없어도 불만스러울까?)
누군가는 진정한 행복이란 욕망 없이 평온한 상태라고 했지만, 모든 형이하학적인 욕망이 충족되면 그 또한 행복이지 않을까?
삶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나는
저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에는 이런 미래의 런던에 의문을 품는 인물들이 있다.
버나드 마르크스는 알파플러스의 지능에 하급 인간의 신체를 가진 사나이다.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고자 이 멋진 신세계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존을 데리고 온 후, 연예인 병에 걸려 사회에 대한 의문을 깨끗이 잃어버린다. 그에게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반항과 문제 제기는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실제로 그는 아래 계급 사람들에게 강압적이다) 그러나 결국 변방의 아이슬란드로 쫓겨 가게 된다.
헬름홀츠는 외톨이로 지내는 버나드의 친구다. 뛰어난 지능과 뛰어난 신체를 가졌으나 전체주의적인 이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오지로 추방된다.(버나드와 달리 자발적인 면이 있다)
야만인 존은 버나드 덕에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멋진 런던에 들어왔으나 이 세계의 모습에 오히려 절망을 하게 된다. 오지로 도망을 가지만 거기에서도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존은 인간으로서의 권리, 불완전하더라도 인간답게 살 권리(스스로의 판단 하에 알 수 없는 미래를 헤쳐나가는)를 요구하다가 자살하고 만다.
즉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사회가 결국 아무리 효율적이고 편리하고 고통이 없다 하더라도 깨어 있는 자유인이 살 수 없는 지옥과 같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지리멸렬한 삶.
이 사회의 불합리, 내가 속한 조직의 무지막지함,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다고 생각이 될 때
그까짓 것 생각 않고, 아무 생각 않고 지내면 오히려 낫지 싶다 생각이 될 때
내가 사고하는 개인이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유혹은 정말 장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