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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by 궁금하다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이 소설에 이 말은 가당치 않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농담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코믹 SF의 신화 '히치하이커' 시리즈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심오하고 철학적인 거대한 농담

이기 때문이다.

농담한 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들러붙어 서로를 피곤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웃 아서 덴트가 어느 날 자기 집이 철거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시청 지하실에 철거 공고가 한참 동안 게시되어 있었고 그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은 아서의 잘못인 것이다.

아서는 불도저 앞에 드러누웠지만 친구인 프리펙트 포드(이 친구가 히치하이커 외계인, 베텔게우스 행성 출신)의 제안으로 맥주를 한 잔 하러 술집에 간다. 그리고 그때, 초공간 우회 고속도로를 만들고자 하는 보고인들의 공병함대에 의해 지구는 순식간에 파괴된다. 집은 철거되고, 그것보다도 지구 자체가 철거된다.

어느 날 아침 이 지구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목숨을 구한 아서와 포드는 보고인의 우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요리사에게 구해지게 되고 보고인의 우주선에 무단 침입한 죄로 다시 우주로 버려진다. 그랬다가 은하 대통령인 자포드와 트릴리언의 우주선(이것도 자포드가 훔친 것)에 구해져서 우주를 여행하게 된다.

자포드와 트릴리언은 행성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별(마그라테아)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다시 제작되고 있는 지구를 본 다음, 지구 제작의 의뢰인은 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쥐들은 최후의 지구인 덴트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지구 2호의 제작을 취소한다.

그리고 들이닥친 우주 경찰, 혼란 속에서 네 명은 살아남고 다시 평범한 우주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가 워낙 맥락이 없어서 줄거리 파악이 굉장히 어려웠다.

이나마가 떠오르는 전부다.


이런 소설에 설득력을, 리얼리즘을 갖다 대는 것은 옳지 않다.

영국식 블랙 유머라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사람들은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라는 발상,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고 그런 만큼 뭔가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다는 것. 경쾌하게 근엄한 것들을 비꼬는 모습.

뭐 이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선 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면이 있다.

지구도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거다.

우리가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 그럴 수 있는 거다.

그리고 그 순간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은 하찮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는 순간 일본 내부의 문제는 하찮게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고

미국이 러시아에 핵미사일을 발사해서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순간 날마다의 출퇴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

상상할 수 있지. 그러면 그 순간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상상해 볼 수 있지.


그런데


소설은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간다.

지구가 파괴된 그 이후로 차곡차곡 쌓이는 농담은 피곤할 뿐이다.


자포드는 트럼프를 연상하게 하고

지구 제작 의뢰를 맡겼다는 것들은 트릴리언의 애완 생쥐 두 마리.

반복되는 우연, 그것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가는 또 시시껍절한 농담을 한다.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어나가는 거짓말쟁이 소년의 허풍 같다.


자의식이 강하고 상처받기 쉬운 거짓말쟁이 소년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그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고 있는 상담 교사의 심정.

그만하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고 지쳐서 본인 스스로 그만둘 때까지 진지한 척 들어주고 있는 상담 교사의 심정.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영국식 블랙 유머는 내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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