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자마자
나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누가 괴물인가?
결국,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영화는 싱글맘 엄마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아이 몸에 난 상처와 아이의 거짓말로 인한 오해, 엄마의 시선으로 보면 괴물은 자명하다.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교장과 학교 선생들.
잘못을 명확히 인정하고 사과하면 엄마는 용서할 수 있는 양식이 있는 여자다. 그런데 괴물 같은 학교와 선생들은 잘못을 덮고 면피하려는 태도만 보인다.
교장의 영혼 없는 태도, 무표정한 얼굴은 괴물의 혐의를 씌우기 좋다.
다음
담임교사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면, 우연한 실수와 직업적 친절 수준을 지닌 교사는 호구에 가깝다.
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사건을 무리 없이 마무리 짓는 방법으로 알고서는 아이 부모에게, 학부모들에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는 사직.
폭력 교사의 누명을 쓰고도 마지막에 미나토의 집을 찾아가서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는 호구 캐릭터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면, 요리는 동성애적 면모가 있고 그것을 아이의 아버지는 돼지의 뇌라고 말한 듯하다.
자신을 돼지의 뇌라고 말하는 요리와 그 아이를 좋아하는 미나토는 서로 좋아했고 그것을 숨기려고 거짓말을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요리는 아빠가 다니는 호스테스바에 불을 지르고 만다.
그럼 결국 괴물은 아이들 아니냐?
마지막에 아이들은 예쁘고 밝은 햇살 속에 있다.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사회의 편견 속에서도 아이들은 순수하다(?). 뭐 이런 건가?
어떻게 해도 애들은 죄가 없냐? 결국은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사회가 잘못이냐?
선생은 호구냐? 엄마는 괴물 아니냐?
특히 엄마는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게 한다.
엄마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상식적인 태도는 선생의 밥줄을 끊었고 사회적인 생명을 목 졸라 죽여버렸다.
계속적인 질문을 떠오르게 하는 열린 결말.
이것은 작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고약한 악취미가 아닐까?
문제를 던져주고 그 이후에는 나 몰라라. 그리고는 잽싸게 저 멀리 달아나서 사람들을 쳐다보는 듯하다.
그러면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한다.
점잖게 그걸 지켜보면 되지. 그럼 작가주의 명감독이 되지.
아. 얄미워.
여기까지가 영화를 보자마자의 내 감상.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인터넷에는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이 많이 있다. 특히 이 영화가 편견에 대한 영화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었다.
영화 속에도 수많은 편견이 나오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편견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
엄마는 싱글맘이라는 사회적 편견, 교사는 교사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 동성애는 무서운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 등등
개별적으로 따지고 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 다 이해가 되고 연민의 대상이 된다.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 모두에게 괴물이 되는 사회다.
결국 아이들은 그 수많은 편견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이 사회야말로 괴물을 만들어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인 셈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지만
명확하게, 딱 잘라 뭐라 하기 힘든 영화다.
그래서 왠지 꿀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