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벚꽃(김탁환)

by 궁금하다

닥터 페퍼.

콜라와 비슷한 검은 액체.

톡 쏘는 탄산은 비슷하되 콜라와는 다른 강렬한 맛.


나는 요즘 닥터 폐퍼를 가끔 마신다.

콜라는 너무 익숙해서 시들하고 자극적인 맛이 필요할 때는 이걸 마신다.(왠지 더 힙한 것 같기도 하고??????)


전에 김탁환의 지괴소설 부여현감 귀신체포기를 읽고 뭐라 하기가 좀 애매했다.

이 냥반이 하는 새로운 소설적 시도를 내가 막 폄훼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서 읽은 김탁환의 단편 소설집.

진해 벚꽃이다.

마침 나에게는 닥터 폐퍼와 같다.


진눈깨비, 열정, 스트레이트플러시면 죽는다, 감동의 도가니, 외계소너 혈루 회복기, 대한민국 교사의 죽음, 진해로부터 29년, 아내와 나

이렇게 여덟 편이 실렸고

나는 그중에서 진눈깨비가 제일 좋았다.

일찍이 소나기라는 소설이 있었고 소년과 소녀의 아삼삼한 첫사랑을 다룬 적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닥터 페퍼다.


소년은 열세 살 봄 창원에서 마산으로 전학을 왔고, 폐결핵에 걸린다. 늙은 의사는 "니 절대로 뛰믄 안 된다. 니 가심이 가을 되믄 떨어지는 숭숭 이파리 된다"며 협박을 하고 축구 선수, 사냥꾼, 마라토너를 꿈꿨던 소년은 유폐된다.

거기에 찾아온 숙이. 신나게 책 얘기에 열중하던 소년에게 숙이는 말한다.

"나가자!"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바람에 뒤이어 진눈깨비까지 흩날리기 시작했으니까.

공을 차던 아이들도 젖은 머리를 털며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급히 나오느라 우산도 챙기지 못했다. 비 같기도 하고 눈 같기도 한 알갱이들이 볼을 간질이며 어깨에 내려앉았다. 솔직히 나는 춥고 불편했다. 가을로 접어든 후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집을 나선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숙이 양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코 끝에 내리는 알갱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차츰 작아지더니 입매가 초승달로 변했다. 검지로 그 달을 따고 싶었다.

“가자!”

숙이 등을 돌렸다. 그녀는 천천히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열 걸음 스무 걸음. 땅에 박힌 빨갛고 노랗고 하얀 비닐 천을 꾹꾹 눌러 밟았다. 나는 오른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헛기침이 쏟아졌다. 200미터 트랙을 반 넘게 돈 숙은 이제 나를 향해 곧장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허리를 펴고 엄지발가락에 힘을 실었다. 반년 넘게 내 안에 잠자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려. 달리는 거야. 내 삶을 좁은 방에 가둔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저 계집앤 널 죽이려는 거야. 평생 숭숭 이파리로 살고 싶니? 다시 깨어난 목소리가 받아쳤다. 넌 벌써 많은 걸 잃었잖아? 쿵쿵쿵쿵 울리는 땅. 휘휘휘휘 흔들리는 바람. 양 떼도 되고 검은 용도 되는 구름. 이제 넌 그것들을 책으로만 읽지. 땅과 바람과 구름은 읽는 게 아냐. 만나는 거지. 내가 물었다. 어떻게 만나? 목소리가 구석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몰라? 정말 다 잊은 거니? 그 순간 숙이 내 어깨를 쳤다.

“따라와. 어서!”

나는 왼 무릎을 한껏 오므렸다가 폈다. 다음엔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내디뎠다. 두 팔을 번갈아 휘저으니 턱이 들렸다. 진눈깨비는 어느새 차가운 비로 바뀌었다. 눈과 코와 귀와 입으로 빗방울이 들이쳤다. 어느새 숙을 따라잡았다. 반년이나 쉬었지만 내 몸은 이 즐거운 놀이를 잊지 않았다. 손과 발과 등과 가슴과 머리는 어떻게 서로를 배려하고 언제 경쟁하면서 어우러져야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알았다. 곧게 뻗은 트랙을 확인하고는 눈까지 감아 버렸다.

창원의 벗들 대부분도 이 “눈감기”를 즐겼다. 처음에는 풍경이 말을 걸지만 한 참 달리다 보면 내 몸속에서 목소리가 났다. 눈을 감으면 몸들이 내는 소리가 더 잘 들렸다. 갸르르 허파는 부풀어 올랐고, 규구를르 위는 높은음과 낮은음을 번갈아 냈으며, 흐흐흐흐흡 간은 나쁜 기운을 빨아들이느라 16분 음표들을 연달아 이었고, 우웅 대장은 긴 침묵 사이에서 드물게 울렸다. 특히 나는 발바닥을 아홉 등분하여 각각의 떨림을 어둠 속 흑판에 새겨 두기를 즐겼다. 모래길을 달리다가 자갈길로 바뀌거나 어젯밤 노루가 지나가는 바람에 옴폭 파인 흙길을 밟을 때, 발바닥은 진저리를 치며 미세한 차이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아홉 등분한 발바닥 중 어디에 힘이 실리는가에 따라 신체 각 부위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일이삼 일이삼 일이삼. 발바닥 앞쪽이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왔다. 미친개처럼 달려라, 달려!


그러고 나서 서른이 넘어 숙을 다시 만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고, 그게 다다.

뭔가 썸씽 스페셜한 것은 없지만


소년의 열렬한 달리기가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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