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저 2호가 태양계를 벗어난 것도 벌써 2018년이다.
지적 생명체가 발견될 경우, 인류를 소개하기 위한 메시지를 싣고 그야말로 저 끝없는 우주로 나아간 것이다.
칼 세이건은 1977년에 우주선을 발사하고 1996년에 마지막 숨을 쉬었으니까, 아마 자신의 생전에 뭔가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우주에 대한 꿈은 참으로 낭만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자의 순수한 꿈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또한 그에게서 인간이 가져야 할 겸손을 가르치는 선지자의 모습을 보는 모양이다.
지구 도처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끝없는 바다를 정복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지구의 모습은 바깥세상의 천체에 비해서 더욱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제왕과 왕자들은 반성할지어다. 그대들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래서 어쩌면 불쌍해 보이기조차 하는 보잘것없는 한 구석의 주인이 되고자 그렇게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 1690년경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또 10억 배의 그리고 또 거기에 10배나 되는 수의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우주의 한구석에서 의식의 탄생이 있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전 우주적인 시간에서 인간이란 무엇이고 나는 또 무엇인가?
나는 생각하며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고작 한 끼의 식사, 잠시의 쾌락, 내 가족들의 생존, 이런 것들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저 멀리 또는 어항 밖의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땅속의 집을 나와 먹이를 옮기려고 노력하고 있는 개미들을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개미는 내 존재 자체를 모르지 않을까?)
그러면 이 전 우주적인 시간 속에서,
한낱 먼지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한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가?
이 글에서 기억나는 단편적인 것들 중에 인상적인 것을 하나 말하라면 빛의 속도와 시간에 관한 것이다. 빛의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게 되면 시간은 느리게 간다.(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 안에서는 말이다.) 그리하여 20광년 정도의 우주여행을 하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지구에서는 약 3만 년의 시간이 흐른 후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주에는 대기가 거의 없고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고 그렇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주를 쏘아 올린 유인 우주선이 빛의 속도로 우주를 떠돌다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과연 지구에 인류는 그대로 존재할까? 아니면 지금 유령처럼 떠도는 외계인에 대한 소문도 아득한 옛날 고대 문명의 지구(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3만 년 전에 엄청나게 발전했었던 문명이 있었다고 한다면)에서 떠나보낸 우리 선조의 귀환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이 두꺼운 책을 읽고 나서, 읽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런데 또 뭔가 큰 깨달음, 감동을 느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왠지 모를 초조감, 약간의 허탈감. 아쉬움, 등등을 느낀다.
친구는 말한다. 상상력이 있어야 이 책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지구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못 느끼고 있는 자신 또는 세계가 신기하지 않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