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욕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욕망이 없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을까?
끊임없는 갈증, 결국은 타는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것이 인간 아닐까?
스스로를 계속해서 반추하게 만드는 소설.
이 소설 '소립자'는 굉장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두 형제의 초상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벽>을 연상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에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못다 이룬 꿈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성애 장면의 충격적인 묘사를 보면서 카트린 밀레의 <카트린 M의 성생활>과 이 소설을 비교하려는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소립자>에는 서구 사회의 천하고 비열한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관철되어 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특히 브뤼노)을 통해서 <자멸해 가는 서구>의 고통에 찬 삶, 포르노는 지천으로 널려 있으나 사랑은 없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이 소설이 <신 자연주의>로 분류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고, 우엘벡이 여기저기에서 공격을 당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고통의 근원을 공략하는 독한 풍자, 소설의 마지막 편잡자 후기)
제목이 '소립자'인 이유는
우엘벡이 현대 사회의 인간을 ‘관계가 단절된 원자’로 보기 때문이고, 제목은 현대 인간의 해체된 상태를 은유합니다. 우엘벡은 두 인물(미셸과 브뤼노)을 하나의 큰 실험 속 소립자처럼 배치하여 현대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파편화하고 해체하는지 보여 줍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미셸은 성적 번식이 필요 없는 새로운 인류에 대한 이론을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 자체를 생물학적 입자(소립자) 수준에서 다시 설계하려는 관점입니다. 즉, 생명과학과 물리학적 시각에서 인간을 다시 정의하는 테마가 제목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단순한 허무주의 비판을 넘어, ‘해체된 인간(Atomised Human)’을 다시 재조립(기계적/과학적 재구성) 하려는 사유를 담습니다. 제목 “소립자”는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우엘벡의 근본적 문제 제기입니다.
(챗GPT를 통해 긁어온 유럽권 비평서, 우엘벡 인터뷰(1998-2001))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네 생각은 뭐냐구?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브뤼노다.
끊임없이 욕망하고
계속해서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바로 '그', 브뤼노다.
어려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청소년기에는 지독한 학교 폭력에 당하는 그
더 자라서도 변태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다.
장례식 다음 날에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브뤼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브뤼노가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은 아파트의 큰방에 있었고, 브뤼노는 자기 침대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이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더더욱 그러하다.
브뤼노 클레망은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로 보내지고 거기에서 참혹한 괴롭힘을 당한다. 그야말로 오메가 수컷.(알파 수컷의 반대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는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유능한 의사를 만난 덕에 모발 이식도 잘되었고, 헬스클럽에 규칙적으로 나간 덕에 근육도 보기 좋게 붙어 있었다. 마흔두 살 먹은 남자치고는 몸매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는 게 그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라 마신 다음, 잡지 위에 정액을 내쏘고 욕망을 거의 가라앉힌 채 잠이 들었다.
그녀는 젖가슴을 앞으로 내미는 우아한 동작으로 레이스 달린 작은 팬티들을 빨랫줄에서 걷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허공에서 폭발하여 지방질 섬유로 산산이 흩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청소년기 이후로 달라진 게 무엇이 있는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욕망은 예전의 그 욕망이었다. 욕망을 채울 수 없으리라고 느끼는 것 또한 예전 그대로였다. 젊음만을 존중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점차로 황폐해진다.
1975년 10월,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에 브뤼노는 아버지가 사준 원룸으로 이사했다. 그때는 자기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내 환상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파리 3 대학의 문과대에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았다. 하지만 모두 사귀는 남자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령 사귀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브뤼노의 파트너가 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유전자 조작, 성적인 자유, 노화에 맞선 투쟁, 레저 문화 등 모든 점에서 <멋진 신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천국이야.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바로 그런 세계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왔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교사로 근무하던 브뤼노는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을 추행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아줄레(브뤼노가 상담받던 의사)는 무척 불안했을 거야. 언론에서 소아 성애에 관해 한창 떠들어 대기 시작하던 때였어. 소아 성애에 대해 맹공을 퍼붓자고 기자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듯했어. 늙은이들에 대한 증오심, 늙는 것에 대한 혐오감을 이유로 늙은이가 미성년자를 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국민적 대의가 되어 가는 중이었지. 나는 나이 어린 여학생을 상대로 교사의 권한을 남용한 파렴치범이었어. 게다가 그녀는 아랍 계 이주민의 딸이었으니 인종 차별의 혐의까지 받게 될 판국이었어. 요컨대 면직은 물론이고 린치를 당해도 싼 사안이었지. 아줄레 박사는 2주일이 지나자 조금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어. 조금 있으면 방학이 시작되는 데다가 피해자인 아질라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 내 사건은 미성년자에 대한 성추행이 아니라 교사들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의 양상을 띠어 가고 있었어. 결국 아줄레 박사는 나를 자살할 우려가 있는 우울증 환자로 규정하고, 지속적인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당국에 보고했지.
그야말로 노답!
그런데 개처럼 헐떡거리던 그도 그의 성적 욕망을 이해해 주는 크리스티안을 만나고 그녀를 통해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티안과 해피엔딩을 맞지 못한다.
그는 라 샤펠 앙 세르발 근처에서 방향을 틀었다. 콩피에뉴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들이받아 버리면 모든 게 아주 간단하게 끝나 버릴 듯했다. 그는 몇 초동안 더 망설이다 돌아 나왔다. 가엾은 크리스티안. 그는 크리스티안이 누아용으로 떠난 뒤에 며칠 동안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는 그녀가 아들과 단둘이 영세민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기도 했다.
그녀 말마따나 그가 장애자를 돌보며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에 대한 원망을 품지 않고 죽었을 것이었다. 계단 아래 우편함 근처에서 그녀의 휠체어가 부서진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얼굴이 부어오르고 목이 부러진 그녀와 함께. 그녀가 소지하고 있던 장애인 카드의 <사고 시에 연락할 사람> 난에는 브뤼노의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 가던 중에 죽었다.
끊임없이 욕망하던 그, 브뤼노는 결국 스스로 정신병원을 향해 차를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남선녀라고 할 수 있는 미셸과 아나벨도(그 둘의 사랑도 무척 애절하다)
그리고
우리의 브뤼노도 마침내는 행복해지지 못했다.
어쩌란 말이냐.
뭐, 성적인 욕망도 좋고, 권력에 대한 욕망도 좋고, 인정 욕구도 좋고
어쨌건 간에 욕망하는 것이 인간일 텐데
이렇게들 좌절시키고 마는가 싶어 슬프다.
카뮈는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라가는 시지프스를 통해서 존재의 이유를 설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엘벡은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라가는 인간의 끝에 더 깊은 심연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슬프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아니 나라는 존재는 안될 수밖에 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슬프다.
소설에 대한 이러저러한 분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에게 강렬하게 감정을 던져주는 것은 브뤼노.
그의 찌질함, 그의 극단적인 성욕, 그러면서도 불현듯 드러나는 자기애.
왜 나는 이런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가?
왜 나는 이런 인물에게 스스로를 겹쳐 보고 있는가? 싶어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