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옛날 동료들을 만나면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갔나 싶어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젊을 때는 함께 축구도 하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다들 오십견에 팔꿈치에 무릎에
고장 나기 시작한 몸들을 끌고 아직도 이리저리 다니고 있다.
잔 고장이야 뭐 금방 수리가 되니까, 제발 큰 고장만 안 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식으로 큰 고장 없이 늙을 수는 없을까?
그러고 보면
욕망에 허우적대다가도 가끔씩 이렇게 소박해질 때가 있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작가 이상국은 나이가 꽤 많다.(나이라고 하기도 죄송할 지경)
시집이 출판된 2016년에 이미 70이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거의 80이 다 되었을 것이다.
성마른 노인들의 모습에 질리게 되는 때도 많은데
이 양반은 참 자연스럽게 잘 늙으셨네(?) 싶다.
세월의 풍파 끝에 성품은 날이 서고 눈알은 핏발이 서게 된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세월을 온몸으로 맞아온 결과 그리된 것이니.....
그런데
이 양반의 시들은 아직도 은근하게 익살스럽고 정겹다.
만약 이 익살과 정겨움이 마음의 여유에서 나온다면
이 여유가 세월이 차곡차곡 쌓인 끝에 얻어진 것이라면
참 대단하다 싶다.
나도 나이 먹고 이런 익살을
나도 나이 먹고 세상에 대한 이런 연민을
갖추고 싶다.
금요일
보통은 금요일 오후에 로또를 산다
시가 안 되는 날은 몇 장 더 산다
나는 언젠가 내 밭에서 기른 근대로 국을 끓여 먹거나
머잖아 이웃들에게 상당한 관후(寬厚)를 보이게 될 것이다
로또는 인류와 동포를 위한 불패의 연대이고
또 그들이 나에게 주는 막대한 연민이다
나는 부자가 되면 시 같은 건 안 쓸 작정이다
어쩌다 그냥 지나가는 금요일은 불안하다
누군가에게 이 세계를 그냥 줘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은밀하게 그것을 맞춰보고는
아, 나는 당분간 시를 더 써야 하는구나 혹은
아, 시도 참 끈질긴 데가 있구나 하며
다시 금요일을 기다린다
도둑과 시인
어느 해 추석 앞집에 든 도둑이
내 차 지붕으로 뛰어내리던 밤,
감식반이 와서 족적을 뜨고
나는 파출소에 나가 피해자 심문을 받았다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그리고
하는 일 등을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 일이 있고 나는 <달려라 도둑>이라는 시를 썼다
들키는 바람에 훔친 것도 없으니까
잡히지 말고 추석 달빛 속으로
그림자처럼 달아나라는 시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경찰서에서 그 사건을 불기소처분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나라 경찰은 몰라보게 편리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도둑의 무게만큼 찌그러진 차
지붕을 새로 얹는 데 든 만만찮은 수리비에 대하여서는
앞집은 물론 경찰도 전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 시로 원고료를 소소하게 받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미 발표한 시를 물릴 수는 없고
그래서 나는 그 도둑이라도
이 시를 읽어주었으면 하는데……
자두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알은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에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 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시인 생각
내가 사는 도시의 한 아파트에서
고양이를 구하던 119 구조대원이 오 층에서 떨어졌다
그날 고양이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구조대원은 다시는 출근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물두 살
그의 앳된 아내는 유복자를 낳았다
동료들은 슬퍼하며 그를 국립현충원에 묻고자 했으나
국가는 이를 정중하게 거부했다
그가 구한 게 국민이나 정부 재산도 아니고
고작 한 마리 고양이였으므로
너무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양이들은 오랫동안 국민의 양식을 지켰다
그러나 요즘 쓸데없이 빈둥거리거나
떼로 몰려다니며 연애질이나 하는
그들 편을 들자는 건 아니나
언제부턴가 지상에 농사가 없어지고
쥐들도 도시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들도 반건달이 될 수밖에
세상은 쥐도 살고 고양이도 살아야 한다
이 모든 게 사람이 저지른 일이므로
국가는 그 미망인과 유복자에게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익살, 이런 연민.
강력 추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