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너무 어렸고 지금은 너무 나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한 중학생 때쯤이었나?
그때는 유명한 노벨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명성, '아프락사스'라는 알수없는 이름,
그 유명한 구절,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왠지 모르게 무척 있어 보인다)
에 매료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뜻도 제대로 모른 채 그저 '나도 안다', 이러면서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았을까?(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나의 무지가 탄로 났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소설의 줄거리가 너무나도 빤하고 익숙해서 감동을 받기에는 좀 애매하지 않나?
주인공 싱클레어는 무척 어린 아이다.
그 아이에게 세상은 두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밝은 세계와 어둠의 세계, 밝은 세계에 속해 있던 싱클레어는 요즘으로 치면 일진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머에게 삥을 뜯기면서 어둠의 세계를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돈을, 나중에는 누나들을 소개해 달라는 협박에까지 시달리던 아이는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크로머에게서 벗어나지만, 배은망덕하게도 도움을 준 데미안까지도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스스로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알폰스 베크라는 친구를 만나고 그를 따라 술집을 간다) 이제 싱클레어는 술을 마시고 교사에게 반항하는 문제아다.
그러다가 베아트리체라는 이상적인 여자 아이,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주었다. 단테는 읽지도 않았지만 어떤 영국 그림에서 그 이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팔다리도 매우 길고 날씬하며 , 두 손과 윤곽에는 정신성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만난 그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이 그림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날씬하고 소년다운 모습, 그리고 정신 또는 영혼이 깃든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크나우어라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 같은 하급생,
“너도 금욕을 하지?” 그가 두려운 듯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성적인 거 말이야?”
“그래, 그거 말이야. 난 2년 전부터 금욕을 하고 있거든. 그 가르침을 알고 난 뒤부터야. 전엔 악덕을 저질렀어. 무슨 말인지 너도 알겠지. 넌 한 번도 여자랑 있어본 적 없어?”
“없어.” 내가 말했다. “맞는 여자를 못 찾았거든.”
“그럼 네 말대로 맞는다고 생각되는 여자를 찾아낸다면 같이 잘 거야?”
“그야 물론이지. 그녀가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약간 조롱조로 말했다.
“오, 그렇다면 넌 잘못된 길로 가는 거야! 완전히 금욕을 해야만 내면의 힘을 키울 수가 있는걸. 난 그렇게 하고 있어. 2년 동안. 2년 하고 한 달 조금 더 됐어! 그거 정말 힘들다! 가끔은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야.”
“어거 봐, 크나우어, 나는 금욕이란 게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나도 알아.” 그가 말을 막았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넌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더 높은 정신적인 길을 가려는 사람은 순수해야 해, 무조건!”
피스토리우스라는 정신의 조력자를 만나고 그에게 상처를 준다.
“피스토리우스.” 내가 갑자기 말했다. 나 자신도 놀라 소스라칠 만큼 악의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내게 또 한 번 꿈 이야기나 해주시죠. 당신이 밤에 꾸는 진짜 꿈 이야기요. 당신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정말 뭐랄까, 지독히 고리타분해요!”
그 끝에 결국은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내 꿈속의 모습이었다! 그녀였다. 키가 큰, 거의 남성적인 여인의 모습, 아들과 비슷한, 모성의 모습을 지닌, 엄격함과 깊은 정열을 드러낸, 아름답고 유혹적인, 아름답고 다가갈 수 없는, 데몬이며 어머니, 운명이며 연인이었다. 바로 그녀였다!
유치하고 유치한 아이가 커 나가는 일반적인 과정, 어머니를 사랑하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극단적 죄책감을 가지고 아버지에 대해 반항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른이 된다. 껍질을 깨고.
껍질을 깬다는 것은 아버지, 즉 당대의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의 전개는 그야말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스토리라인과 유사한 느낌이다.(헤세가 융과 깊이 사귀었다더니)
이런 꿈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내가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꿈이었는데, 나는 절반쯤 미치광이가 되어 그 꿈에서 깨어났다. 크로머가 칼을 갈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우리는 큰 가로수 길의 나무들 뒤에 숨어서 누군가를 기다렸는데,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몰랐다. 그 누군가가 다가오자 크로머는 내 팔을 꾹 눌러서 내가 칼로 찌를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그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그 순간 나는 깨어났다.
데미안은 카인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결국은 절대적 악과 선이란 없다는 깨달음의 과정,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고 이제 나이 든 우리 모두는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래서인지 나는 약간 지루했다.
게다가 베아트리체와 에바부인에게서 보이는 헤세의 이상형, 에바 부인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에서 얼마 전 읽었던 소립자의 히피문화, 신비주의 같은 것이 떠올라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커튼이 드리운 창가에 놓인 좌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막스 데미안이 보였다. 그는 이상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번개처럼 어떤 느낌이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모습이다! 그는 두 팔을 미동도 없이 축 늘어뜨리고 두 손은 무릎에 두었다. 눈을 뜬 채 살짝 앞으로 숙인 얼굴은 빛이 없이 감각을 잃었다. 동공은 죽어서 마치 유리 조각처럼 작고 날카롭게 빛을 반사해내기만 했다.
그리하여
소설의 줄거리가 너무나도 빤하고 상투적이어서 감동을 받기에는 좀 애매하지 않냐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에 죽을 때까지 매달리고 있는 헤세의 모습은 어떤가?
어찌 보면 숭고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애잔하기도 하고 그렇다.
만약 이 소설을 내가 정말 한창 세상을 고민하던 딱 그 시기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그때는 너무 어렸고 지금은 너무 나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