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나는 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김훈의 소설은 문체의 소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전작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안정근이 울면서 발버둥 치는 안현생을 서울 명동성당 수녀원에 데려다주었다.
-교회의 보호 아래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가보니 시설도 훌륭하고 먹는 것도 좋고, 수녀님들도 다들 착하십니다.라고 안정근은 말했다. 안정근의 말을 들을 때 김아려의 표정은 정돈되어서 움직임이 없었다. 김아려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방님. 천주님의 은혜입니다.
안정근이 돌아가자 김아려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안정근은 중근의 동생, 안현생은 중근의 딸, 김아려는 중근의 처)Oct 12. 2024
그리고
지금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김연수의 소설도 문체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정반대의 의미로.
늘 하는 생각이지만 '모름지기 문학가라면 비유를 잘해야지. 비유를 기가 막히게 할 줄 알아야지.'라고 당연한 듯이 말했었다.
또
'어떻게 이런 비유를?'
하고 감탄할 때마다 아무나 소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마음을 품은 적도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소설의 비유가 그렇더라.
김훈의 소설이 아픈 부위를 칼로 바로 째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김연수의 문체는 아픈 부위를 한참 쳐다보다가 약을 살살 바르고 붕대를 칭칭 동여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뭐 낫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오름차순으로, 혹은 내림차순으로 바뀌는 디지털 숫자들을 바라보며. 아니면 새벽 공원길을 달려가다가 길 옆 벤치에 발을 올리고 풀린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며칠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땅거미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 저녁의 조각구름들이 초승달을 스쳐지나가듯. 문득문득. 총총히 정독도서관을 향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느라 땀이 슬맺힌 교복 차림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갗이며 국군서울지구병원 담벼락 밑에서 각자 누런 봉투 안에 든 자신의 엑스레이 필름을 반쯤 꺼내어 햇살에 비춰보던 사병들의 찌푸린 주름, 혹은 서울시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27호 윤보선 고택 돌죽담 모퉁이를 돌아갈 때 그녀를 바라보며 “방 보러 온다던 새댁이유?”라며 환하게 반기던 어느 할머니가 입고 있던 치마의 꽃무늬 같은 것들에 대해, 가끔 하릴없는 마음에 제 손톱을 가지런히 세우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듯. 문득문득.(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어우, 기가 막힌데?
감탄을 거듭하였고 2005년에 출간되었는데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을까?
사서 선생님이 요즘 핫한 책이라고 준 목록에서 이 책을 찾은 것도(올해 재판을 찍은 모양)
내가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연수'라는 책 제목과 똑같은 작가의 이름도
마치 홀리듯이 이 책과 대면하게 된 이유인 것 같아서 신박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억나는 인물이나 깊이 감정이입되는 누군가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뿌넝숴(不能設), 특히 뿌넝숴는 정말 강렬한 느낌을 주는 단편인데도
중간중간 그 장황한 수다(?)는 좀 껄끄러웠다.
요즘 정신이 사나워서 그런가?
그래서 집중을 못해 그런가?
길고 긴 만연체 문장, '나'가 나오는 비대한 자기 고백의 형식,
비슷비슷한 느낌 때문에 나는 처음에 이 소설집이 단편 소설 모음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이 녀석이 아까 나왔던 것 같은데? 좀 다르네?
이러면서 짜증을 냈었다.
그야말로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 편안할 때, 다시 한번 집중해서 읽어보고는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