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는 그와 같은 성욕의 즐거움과 식욕의 즐거움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나의 심경을 사쓰코만은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채고 있는 듯하다. 이 집안 식구들 중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사쓰코뿐이다.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모른다. 사쓰코는 조금씩 간접적인 방법으로 시험하며 그 반응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추한 주름투성이 늙은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밤에 잘 때 틀니를 빼고 거울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위턱과 아래턱에 내 이는 한 개도 없다. 잇몸도 없다. 입을 다물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합죽이처럼 붙고 그 위에 코가 늘어져 턱까지 닿는다. 인간은 물론이고 원숭이도 이렇게 추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얼굴로 여자가 나를 좋아할 거라든가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한다. 그 대신 그런 자격이 전혀 없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세상 사람들이 안심하기를 기다린다. 그런 틈을 노려 어떻게 하겠다는 주제도 안 되고 실력도 없지만, 안심하고 미인의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다. 나는 실력이 없는 대신 미녀를 미남에게 접근시켜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고는 그것을 즐길 수는 있다. ……
소설 속의 '나'는 늙고 추한 늙은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욕망이 남아 있다.
'나'가 부유한 양반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사회에서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 '나'에게 감정이입하고 있는 나도 이제 곧 늙어가겠지?
나도 벌써 저녁만 되면 눈알이 뻑뻑하고 따끔거린다.
지금은 많이 나았지만 불과 얼마 전에도 오십견 때문에 어깨가 너무 아팠다.
나도 이제 곧 노인이 되면 이렇게 되는가?
싶어서 무서웠다.
소설 속의 '나'는 77세. 그는 무희 출신의 며느리(사쓰코)에게 성욕을 느낀다.
뭔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체력은 없기 때문에 더욱 애잔하고 또 지리멸렬하면서도 그렇게밖에는 안 되는 욕망이라서 더욱 강렬하다.
사람들은 성별을 구별할 때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노인은 그냥 노인이다.(성별 구분조차 무의미한 존재)
그런 노인이 며느리의 발을 탐하는 이야기.
일기인 만큼 날짜별로 진통제 몇 알, 혈압 몇, 이런 식으로 날짜별로 반복된다.
노인은 300만 엔이(1960년대 그 돈이면 현대로는 억대의 돈) 넘는 묘안석을 며느리(사쓰코)에게 사주고 딸(이쓰코, 구가코)과 아내는 안중에 없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 대한 봉사를 돈으로 바꾸는 여자, 어찌 보면 요부다.
1인칭 주인공 시점 '나'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이 연애(?)를 본다.
'할멈(노인의 아내)에게 들키면 안 되는데...... 아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굉장한 마력이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욕망밖에 남지 않은 추한 늙은이가 되면 어떡하지 싶어 공포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 사쓰코 부인은 17일 오후 3시경 하네다에서 마미아나 댁으로 돌아갔다. 부인은 바로 조키치 씨에게 전화를 걸어, 드디어 노인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져서 이제 자신은 더 이상은 단 하루도 행동을 함께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혼자 먼저 돌아왔다는 뜻을 알렸다. 부부가 상의한 결과, 노부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둘이서 친구인 정신과 의사 이노우에 교수를 찾아가 어떻게 조치를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교수의 의견은 노인의 병은 이상 성욕이라는 것으로, 현재 상태로는 정신병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 환자에게는 늘 정욕이 필요하며 그것이 이 노인의 목숨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 드려야 한다. 사쓰코 부인은 그 점을 신경 써서 환자를 함부로 흥분하게 하거나 환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부디 친절하게 간호를 해 드렸으면 한다. 그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했다. 따라서 조키치 씨 부부는 노인의 귀경을 맞이한 이래 될 수 있는 한 교수 의견에 따라 노인을 대했다.(책 말미에 나오는 개인 간호사 사사키의 기록)
알고 보니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현 상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나'가 하는 그 위험한 사랑은 늙은이가 가진 이상성욕, 죽기 전에 마지막 불꽃일 뿐이다.
모두가 그것을 알면서(사쓰코마저도) 노인에게 맞춰주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배우들, 제작진들처럼 말이다.
늙은이의 죽음을 불사하는 욕망(며느리의 발을 탁본할 때, 끝없이 올라가는 혈압)
그마저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노인도 욕망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실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마치 안 보이는 것처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사회의 냉정함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