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아름다움 앞에서
어떤 날은 능동적 순응이 어울린다.
그것은 수동적인 포기가 아니라, 머물기로 한 자발적 선택이다. 빨래를 삶아두고 잠시 잠든 사이 예약한 전시는 취소 직전이었으나, 나는 시간의 불친절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일정을 바꿔 배낭을 메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23인치의 랙앤본 청바지가 버겁게 느껴질 만큼 비어 있어, 나는 스카프를 질질 끌리는 허리춤에 질끈 감아 결핍을 동여맸다.
이타미 준의 '수풍석 미술관'은 자연을 장악하지 않는다.
그곳은 자연의 개입을 거부하는 대신, 스스로의 몸에 선과 틈(Crevices)을 내어줌으로써 자연이 제 발로 들어와 드러나게 한다.
건축물의 틈 사이로 바람과 빛이 머문다.
목의 교회에서 느껴진 자연에의 순응과 석의 교회에서 발견한 자기 보존의 의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미묘한 하루의 기온처럼 공존한다.
이것은 삶의 템포(Tempo)에 관한 문제다. 강렬한 속도(Velocity)가 사라진 자리에,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미세한 실루엣만이 남는다.
전시관 안을 천천히 걸으며 그곳에서 판매하는 고급 차를 마시는 대신, 나는 집에서 우려온 차를 마신다. 그것은 외부의 리듬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자율적 선택이자, 나만의 템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여기서 나의 시선은 고정된 카메라(Static Camera)가 된다.
직전 발행한 film critique의 주인공, 로나로 잠깐 돌아가 보자.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나의 침묵>에서 카메라가 로나를 추격하기를 멈추고 그녀의 망설임 앞에 고요히 멈춰 섰을 때, 로나는 비로소 시스템의 도구가 아닌 주체가 되었다.
나 역시 삶의 가속을 멈추고 고정된 카메라가 되어 기다림을 선택한다.
이것은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감각의 정교한 조율이다. 정화의 상징인 끓는 빨래, 외부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최소한의 통로인 라디오 방송, 그리고 나만의 페이스를 담은 차 한 잔. 이 일상의 운영 시스템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다.
미지의 아름다움 (The Sovereignty of Pending).
사무실 창가의 여인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볼 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평온을 느낀다. 여인초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하루의 기온에 반응할 뿐, 성장을 서두르지 않는다.
이 모든 서사는 결국 '나'라는 하나의 방, 하나의 집이라는 형태 안에 존재한다.
이 형태가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될지, 아니면 초라해질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형태는 시간과 함께 흘러갈 뿐이며, 그 흐름은 나의 통제 밖 영역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 그 미지야말로 내가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한남동의 좁은 뒷골목 위로 낮게 흐르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그 골목에서 만큼은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님을 느낀다. 오히려 지나가는 행인들의 짙은 향수와 화려한 색채의 코트, 높은 힐 소리가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