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과 온도, 로트레크의 선
스텔비오 치프리아니의 음악을 들을 때면, 나는 이탈리아 남부 어딘가의 오래된 집 안을 떠올린다. 오후의 시간이 느슨하게 늘어진 공간, 오래된 나무 창틀, 창문을 반쯤 가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오고, 바람은 방 안에 머물다 나가는 길을 잊은 듯하다. 그의 선율은 무언가를 강요하는 법이 없다. 앞서가려 하지 않고, 붙잡지도 않는다. 체온이 남아 있는 소파의 천처럼, 잠시 몸을 맡겨도 되는 온도로 흘러간다.
지독하게 피곤한 날에도, 치프리아니의 음악은 서두르지 않는다. 무심한 듯 다정한 속도로, 하루의 가장 느린 부분을 데리고 온다. 리치 오디 전시관의 카탈로그를 한 장씩 넘길 때도 비슷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향수라기보다, 애쓰지 않아도 어딘가에 속해 있었던 한때의 상태.
이야기로 엮이지 않아도 충분한 기억들. 흑백 사진처럼, 복잡한 서사 없이 펼쳐지는 시각적 산문들.
이런 정서는 내가 쓰는 문장들과 닮아 있다. 화려하지 않은 몸짓에 오래 머무는 시선,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침묵. 계절은 소리 없이 박동하고, 구름은 목적 없이 지나간다. 바람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어떤 것도 고조되지 않고,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시간과 관계는 조용히 마모되며 흘러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izPiqPWyJh0
나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피갈 광장〉 엽서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 그림은 도시를 찬미하지 않는다. 축제가 끝난 뒤 남아 있는 공기를 바라볼 뿐이다. 화려한 밤과 공연의 빛은 이미 물러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감내해야 할 피로감이 떠도는 여인들의 초상. 선들은 단호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장식은 없다.
왜곡이 있지만 과장되지 않고, 오히려 본질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해골처럼 앙상하게 남은 자세와 무게.
그 경제적인 선의 흐름 속에서, 다리는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거의 부드럽고, 최면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그 단단한 선의 감각은 나를 어머니 집의 온돌 바닥까지 데려온다. 그날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둘 다 퍽 키가 크다. 요즘 우리는 거의 체중이 비슷하다. 오랜 병환으로 말라 있어 꼬리뼈가 아프다는 노모는 침대에 눕고, 골반뼈가 튀어나온 나는 대신 바닥에 몸을 뉘었다. 내 몸은 더 이상 바닥의 딱딱함에 저항하지 않았다. 뼈와 바닥이 완충 없이 맞닿는다. 그 접촉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단순함을 느낀다. 꼭 필요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깎여 나간 골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웃었다.
“왜 우리 둘 다 이 모양일까?”
그 웃음은 슬픔으로 번지지 않았다. 사태를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야윈 몸들, 여전히 남아 있는 온기, 그리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닥. 나는 온돌의 열기가 등을 타고 천천히 번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방 안 어딘가에서 치프리아니의 선율이 계속 흐른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선들은 이제 그림 엽서를 벗어나 공기 속을 떠다니는 듯하다. 바닥을 누르는 뼈의 압력은 조금 느슨해진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고통이 아니라 익숙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시간은 기록되기를 원치 않은 채 흘러가고, 우리는 그 안에 남는다.
특별한 사건을 담지 않는 두 대의 고정된 카메라처럼.
딱딱함과 조용함이 함께 공존한다. 피로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엷어진다. 그리고 그 엷어진 틈 사이로, 침묵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가기 전, 휴식과 닮은 무언가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조용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