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아니라 선명해지는 것들
Part III. 관계의 상실 뒤에 남은 고독
삶의 감속(deceleration)은 에너지를 지탱하는 속도의 부재라고 명명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안에서 완전히 대사(metabolize)되어, 비로소 투명해진 속도다.
가속의 경험을 지닌 적이 없는 이의 느림은 그저 타성일 뿐이다. 하지만 최대치로 치달았던 관계가 한 풀 꺾인 뒤의 감속은 전혀 다른 차원의 운용이다. 그것은 기억과 보정, 그리고 지독한 절제를 필요로 한다.
샤워실의 수증기 속 제라늄 리프 향이 톡 쏘는 알싸함으로 코 끝을 찌르고, 그 뒤를 이어 해변가를 떠나가는 La: burket의 비치 로즈의 짭조름한 소금기가 섞인 장미 향이 피부에 내려앉는다. 이 향들은 서로를 점유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차가운 물줄기 아래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서서히 번져갈 뿐이다.
신경계는 단순히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를 다시 설계한다.
외부의 눈에 정지로 보이는 것은 사실 내부적으로 지속되는 미세한 조정의 상태이다.
그것은 무너짐이 아니라, 정교한 조율(fine-tuning)로 신경계에 서서히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친밀감 ㅡ 혹은 관계의 감속을 상실로 오독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뜨거웠던 가속의 뒤편에서 우리는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한다.
상대의 침묵을 무관심으로, 담백해진 말들을 결핍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한 것은 단지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의 눈금일 뿐이다.
상대라는 중력에 끌려 임계점까지 폭발하던 감정의 가속이 멈춘 것뿐이다.
속도는 상대의 복잡함을 단순화한다. 열정이라는 힘으로 그 사람의 모순을 짓누른다. 반면 감속은 다시 타자의 다층적인 결을 불러온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그늘이 보이고, 시간은 길게 늘어진다. 서로를 향한 이해는 더 이상 완성된 형태로만 도착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씻겨지며 채워진다.
이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시스템은 가짜 신호를 보낸다.
지루함을 공허함으로, 고요를 무관심으로, 중립을 결핍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감속은 다른 종류의 반응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지속 가능성이 시작된다.
낮은 속도에서 비로소 서로의 맞물린 뼈대와 이음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살짝 비껴간 마음의 결은 절망적으로 변하기 전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가 서로에게 지불해야 할 감정의 비용은 명확해진다.
욕망은 더 이상 절박함과 혼동되지 않는다.
감속을 통해 강도를 잃는 것이 아니다. 해상도(resolution)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남는 것은 폭발의 스릴이 아니라, 그 스릴 없이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계기판의 rpm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내면의 생동감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나 적은 손상을 입히며 나아가는지로 측정한다.
이것은 포기가 아닌 일종의 공학(engineering)이다.
속도는 이제 의미를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 가능한 도구일 뿐이다.
선별적으로 배치되고, 엄격하게 통제되는 도구.
그러므로 감속은 후퇴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통제이다.
가속하지 말아야 할 때를 배운 시스템은, 이미 속도를 진실로 착각하는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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