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페인 커피와 무하의 아르누보

속도가 아닌 밀도의 시선에서

커피는 디카페인이었다.

그 진공감만큼 모호한(ambiguous) 만남이 끝난 후 무하의 전시를 보러 갔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경계의 긴장감을 낮추기 위한 디카페인.

그 대화는 불쾌하지도, 그렇다고 강렬하지도 않았다.

예의 바른 대화, 예상치 못한 통찰, 그러나 감상은 없었다.

그것은 어떤 갈등이나 동력도 없이 끝났으며, 해소를 요구하지 않는 지적 인식의 잔여물(Residue)만을 남겼다.

전시는 그 상태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알폰소 무하의 작업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장식적인 선, 이상화된 얼굴들, 전문가적 확신으로 꾸며진 미(美).


포스터들은 시각적으로는 풍부하였으나 정서적으로는ㅡ적어도 나에게는ㅡ 닫혀 있었다. 나는 저항도 마찰도 없이 작품 사이를 스쳐 다녔다. 마치 그 이미지들은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통과되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였다.

Alfons Mucha - F. Champenois Imprimeur-Éditeur.1897

그러다 예기치 않게, 발걸음이 멈췄다.

범람하는 액자 속 평온함 사이에서, 한 얼굴이 패턴을 깨뜨렸다.

로렌자치오(Lorenzaccio).


그는 다른 여인들처럼 꽃에 둘러싸여 있지도, 화려한 보석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았다. 그는 어두운 밤의 색을 닮은, 빛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육중하리만큼 검은 벨벳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무하의 다른 인물들이 관객을 향해 찬란한 미소를 전시할 때, 그는 몸을 살짝 비튼 채 자기 내부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 표정은 평온하지도, 이상화되지도, 완결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정지된 채 떠돌고 있는 도덕적 모호함, 즉 망설임을 품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드리워진 짙은 눈가는 보는 이를 안심시키지 않았다. 감탄을 유도하지도, 위안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차가운 금속성 향기처럼, 공간에 팽팽한 긴장을 주입하여 나를 멈춰 세울 뿐이었다.

로렌자치오를 무하의 다른 인물들과 구별 짓는 것은 드라마틱한 강렬함이 아니라, 절제된 서늘함이다. 그의 입술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춘 듯 굳게 닫혀 있고, 손가락 끝은 칼자루를 쥐듯 예민하게 오므라들어 있다.


그것은 이 지루한 전시에서 나를 머물게 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Alfons Mucha (Czech, 1860-1939) - Lorenzaccio




그의 표정은 분류(Categorization)에 저항했다. 그것은 영웅주의나 악당의 면모로, 혹은 후회나 자부심으로 완결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미해결된 긴장—도덕적 명료함에 대한 확신 없이 행동을 수행하는 주체의 자각—을 붙들고 있었다.


이 모호함은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리적 실체였다. 사면(Absolution)을 기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선택이 불러올 결과를 이해하고 있는 주체의 모습이었다.


무하의 인물들은 대개 시선의 대상(To be looked at)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탐스러우며, 자세는 교과서적이고, 의미는 안정적이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부서지지도 않았으며, 시선을 되돌려 보내지도 않는다.


반면 로렌자치오는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내려진, 그러나 정당화되지 않은 결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무하의 오에브르(Oeuvre) 내에서 이러한 내면성—위안을 거부하는 태도—은 지극히 드문 것이자, 어쩌면 의도되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양식의 진화가 아니라 서사적 필연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인물이 깊이를 요구했고, 예술가는 그 요구에 응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나를 매료시키는 것이 미(美)가 아니라, 설명되기 직전의 그 순간임을 깨달았다. 나는 일관성을 연기하지 않는 얼굴들에, 관찰자를 위해 완결되지 않는 몸짓들에 끌린다. 나는 달래주는 이미지를 구하지 않는다. 위안에 실패하더라도 그 배치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를 구한다.



이러한 선호는 예술 너머로 확장된다. 대화에서, 글쓰기에서, 그리고 친밀함 안에서, 나는 매끄럽게 봉합되지 않는 것들에 주목한다. 정밀함을 대가로 매끄러운 화음을 약속하는 표면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화해를 강요하지 않고 모순을 지속시키는 상태에 반응한다.

나를 매혹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밀도 그 자체이다. 무언가가 해소되는 대신, 팽팽하게 붙들려 있다는 감각그 자체.


이것이 장식적 미학이 나를 지탱해주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장식은 주의(Attention)를 이끌어 내지만, 그것을 심문(Interrogate)하지는 않는다. 장식은 보는 눈에게 감탄할 것을 권할 뿐, 머무름을 권하지 않는다.


로렌자치오는 감탄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목격을 요구했다.


나의 글쓰기 역시 이 원칙을 따른다. 나는 설득하거나 치유하기 위해 쓰지 않는다. 대신 관찰자의 긴장감을 보존하기 위해, 경험이 위안으로 번역되지 않는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작업한다. 전시회에서 나를 멈춰 세운 그 얼굴처럼, 나는 결론이 나지 않는ㅡ 아니, 낼 수 없는 순간들에 지극히 매달린다. 무엇을 느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지시받기를 거부하는 순간들 말이다.



여의도 위로 쏟아지는 겨울 빛은 젖은 아연(zinc) 빛깔이었다. 그 빛은 주변 빌딩들의 유리 벽면에 반사되어, 강물 위로 날카롭고 무심한 직선들을 그어 내리고 있었다. 이 도시가 가진 무뚝뚝한 선들의 맞물림은 무하의 번쩍이는 곡선들과 고요한 대조를 이뤘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지갑일 수도, 혹은 그보다 덜 만져지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흔히 그렇듯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단 하나의 얼굴이면 충분했다. 그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짐작해온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를 매혹하는 것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단단히 버티는 뼈대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는 모호함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팽팽하게 맞물려 있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그 기묘한 품격에 마음이 움직인다.




나에게 의미란, 바로 그 지점에 머무르는 순간인 것이다.



금요일 연재
이전 10화속도를 멈춘 자리에 핀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