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 말하지 않은 사랑의 시작
말하지 않은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이 매거진은 H라는 인물의 내면을 따라 걷는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청혼을 거절했고,
때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사랑은 말없이 존재했다.
말하지 않았기에
시작도 끝도 없었던 감정에 대하여.
EP.0: 말하지 않은 사랑의 시작
그날, 복도에서…
우리는 종종, 눈으로만 서로를 짚고 간다.
그리고 그 눈빛 사이에 감정이 살아난다.
감정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도착하고,
가장 나중에 입을 연다.
H는,
그날 그저 흰 셔츠를 걸친 아이스 워싱 데님을 입고,
복도 끝에서 돌아오는 그를 마주했을 뿐이었다.
시선은 교차했고,
공기는 서늘했으며,
복도 전체에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설계된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H를 보았다.
H는 그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를 피하지도, 붙잡지도 않은 채
그 짧은 순간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의 손등이 옷깃을 스치듯 팔 옆을 지나칠 떄
움직임은 고의가 없었으나,
기류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바다빛을 품은 모래의 알싸한 향이 남아 있었고-
H는 그 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해마 깊은 한가운데 남아있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자극하는 향.
그날 이후,
H는 어느 각도에서든 그의 그림자를 인지하게 되었고
그는 H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방식으로
항상 곁에 머물렀다.
가끔 옆에 앉아서 회의 장면을 바라보는 식으로.
그 이후로도 복도에서
그들은 여러 번 스쳤다.
다른 문 뒤편에서
그는 말없이 H의 옆을 통과했고,
H는 서류를 정리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H는 안다.
그가 H의 선명한 검은자위에 남아 있었고,
H는 그 침묵의 온도에
오래도록 물들어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았기에 끝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기에 시작도 되지 않았던 그 감정은—
지금도 어느 목요일 오후의
바람과 복도의 소리 사이에 숨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잔향이 남긴 빈 공기 안에서
H는 가끔 돌아서지 않는 법을 연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