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장면, 혹은 미끼

곡성의 성적 장면을 둘러싼 두 개의 독법: H의 해석

나홍진의 영화는 언제나 관객의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곡성》은 귀신과 광신, 폭력과 의심이 뒤엉켜 하나의 악몽처럼 흘러가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잔상처럼 남는 것은 의외의 순간이다. 제사를 지내는 틈 속에서, 비명과 붉은 피와 함께, 돌연 섹스 신이 예고 없이 등장한다. 서사의 표면과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섬뜩하게 스며든 성적 장면.

그것은 스크린에 던져진 채로 다가와 관객을 멈칫하게 하고, 해소가 아닌 깊은 불안감을 남긴다.

관객은 불쑥 끼어든 이 장면에서 당혹을 느끼고, 평론가들은 그 불편을 해석하려 애쓴다.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다.


1. 왜곡된 가치관의 투사 ― 불편을 미학으로 끌어올린 장치


첫 번째 시선은 이 장면을 감독 개인의 세계관이 투사된 미학적 장치로 본다.

나홍진은 언제나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욕망과 두려움 속에서 끝내 무너지고, 자신을 파괴한다.

그 세계 안에서 섹스는 친밀이나 쾌락의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불편을 증폭시키는 파열음이다.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기다리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에 불쑥 끼어들어, 긴장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팽팽히 당겨진다.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에 나오는 반복 강박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효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심리적 욕구는 해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반복을 향한 것이다.¹

섹스 신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능하며, 해소를 거부하고 불쾌함을 영화의 지배적인 정서로 고수한다.

나는 여기서 감독의 태도와 나의 윤리가 겹쳐 있음을 본다.

나 역시 내 삶과 글쓰기에서 카타르시스와 감상주의를 거부한다.

바로 이러한 거부야말로 내가 이 장면을 결함이 아니라 불쾌함에 대한 충실함으로—관객에게 해방이라는 거짓 위안을 허락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읽을 수 있게 한다.


2. 산업적 후킹 ― 흥행을 위한 미끼


다른 쪽 시선은 이 장면을 예술적 장치라기보다 흥행을 위한 계산된 미끼로 간주한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섹스와 폭력은 오래도록 관객을 유인하는 도구였다.²

충격은 화제를 낳고, 화제는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곡성》의 섹스 신 역시 같은 전략일 수 있다.

서사적으로는 필수적이지 않은 장면이지만,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소비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장치.

이 불편은 미학이라기보다 산업의 산물이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도록 설계된 불편이다.

그러나 비판적 거리를 유발하는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와는 달리,³ 여기서의 불쾌함은 해방적이지 않다;

그것은 소비 가능한 것이며, 소비되고 버려질 스펙터클로 제공된다.

불쾌함은 미학적 도전이라기보다 구매해야 할 티켓이 된다.

A cracked mirror — the fracture of reality, the shock of rupture in the ordinary.

3. 교차하는 두 층위-미학적 논리와 산업적 논리의 교차점


그러나 이 두 해석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한 장면은 동시에 작가의 세계관이자 상업적 계산일 수 있다.

감독은 불편을 미학으로 끌어올리려 하고, 산업은 그 불편을 상품으로 포장한다.

관객이 느끼는 당혹감은 바로 이 교차점에서 발생한다.

의미 있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자의적이고,

필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장사 속처럼 느껴지는 지점.

불편한 잔여, 관찰자로서의 정서 위치

4. 결론: 잔여로서의 불편


결국 《곡성》의 성행위 신은 불편을 생산했든, 소비시켰든, 같은 흔적을 남겼다.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묻는다. “왜 그 장면이 필요했을까?”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내부에서 맴돈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나홍진의 가장 급진적인 제스처일지 모른다. 불편을 설명하지 않고, 해석을 관객 각자에게 떠넘기는 것.


그리하여 불편은 이미 영화의 일부가 된다.

Blurred lens, selective focus — a vision unsettled, like memory itself

나는 여전히 카타르시스와 센티멘탈리즘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불편이 순수한 미학인지, 아니면 단순히 강요된 노출인지,

그 판단은 결국 각자의 눈에 달려 있다.

《곡성》은 우리에게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남긴다.

불편은 예술인가, 아니면 상품인가.


그리고 질문은 종종 해답보다 오래 남는다.


각주

1.Freud, Sigmun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1920.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트라우마적 경험을 반복하려는 심리적 경향인 "반복 강박"을 설명한다. 이 장면은 쾌락과 해방 대신 불안과 재경험의 순환을 강화한다.

2.See Kim, Kyung Hyun. Virtual Hallyu: Korean Cinema of the Global Era. Duke University Press, 2011. -한국 영화 산업의 역사에서, 성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는 종종 선정적인 마케팅에 사용되어 관객의 관심을 끌고 흥행을 유도하는 수단이었다.

3.Brecht, Bertolt. “Alienation Effects in Chinese Acting.” In Brecht on Theatre, 1964.-브레히트는 관객이 극 중 서사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신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가 되도록 하는 극적 기법을 사용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곡성』의 불편함은 관객의 감정적 거리를 유도하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한다.


이 분석은 공포영화를 멀리하는 친구와, 라스 폰 트리에의 뒤틀린 세계를 즐기는 나의 상반된 취향에 대한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영화의 '불편함'에 대한 각기 다른 감각이 이 글의 씨앗이 되어주었습니다. 늘 제 글에 깊은 영감을 주는 나의 영원한 독자이자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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