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와하카, 우표박물관, 북한 우표, 88 올림픽 우
2025_6/9
와하카에 6시 반에 도착했지만 AU터미널 근처가 치안이 안 좋다고 해서 터미널에서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다 7시 20분쯤 가방을 메고 출발했다.
나오니까 역시 택시 아저씨들이 호객했는데 여기는 질척이지 않는다. 그냥 "아니 괜찮아ㅎㅎ" 하니까 자기들도 "ㅎㅎ"하고 만다. 우범지역이라고 해서 걱정을 좀 했는데 등교하는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 등 사람들이 바쁜 움직임뿐 위험한 느낌은 없었다. 일부러 출근 시간일 거 같을 때 나온 것도 잘한 거 같다.
+멕시코의 밤은 무섭다. 어제 멕시티를 떠날 때도 이제껏 멕시코시티가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버스에 타서 처음으로 본 멕시코시티의 밤 풍경은 무서웠다. 가로등도 적고 집집마다 철장으로 닫아놓은 것이 더욱 그렇게 느끼게 했다.
그래도 우범 지역이라니 혹시 몰라 절대 범죄와 관련이라고는 없을 거 같은 아주머니 (왜냐하면 어디 급하게 가시는 거처럼 바빠 보이셨다) 뒤를 동선이 맞을 때까지 졸졸 따라갔다. 나도 걸음이 빠른데 그분은 더 빠르신 거 같았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25분 정도, 아침 7시부터 해가 쨍하니 땀이 흐른다. 그늘 한 점 없는 거리를 건너고 건너 드디어 도착한 호스텔.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다. 호스텔 스태프에게 가방을 맡길 수 있냐고 하니 열쇠를 꺼내 러기지 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체크인은 1시부터라고. 부킹사이트 상으로 체크인이 3시라서 샤워만이라도 할 수 있냐 물으려고 했었는데 1시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공용공간에서 좀 있어도 되냐 했더니 테라스를 추천해서 테라스로 올라왔다. 아마도 아침 식사시간이라 그랬던 거 같다. 숙박예약 사이트 후기에서 봤던 것처럼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멀리 시내 풍경도 보이고, 공기는 좀 탁한 거 같았지만 바람도 솔솔 불고 날씨가 좋았다. 그늘에 자리 잡고 와이파이 연결을 시도했는데 안 됐다. (지내며 보니 옥상은 연결이 죽어도 안 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된다) 어쩔 수 없지. 뭔가 배가 고픈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어제 과나후아토에서 샀던 빵이랑 망고를 꺼냈다.
칼이 없어서 야만인처럼 망고를 그냥 껍질 벗겨 와구와구 먹었다. 과나후아토 첫날 먹었던 빵은 여전히 맛있었지만 새로 도전한 빵은 너무 퍽퍽해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어서 반쯤 남겼다. 아무래도 당일에 먹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루를 꼬박 있다가 먹은 거라서 그랬던 거 같다.
다 먹고 바람을 맞으면서 좀 앉아있으니까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일하면서 밤샐 때도 느꼈지만 잠을 안 자는 것만큼 안 씻는 것도 피로감이 더 해지는 일이다. 의도하고 잔 건 아니지만 졸려서 옥상에서 바람을 좀 맞으면서 졸고 나니 9시 조금 넘은 시간. 어디 커피라도 먹으러 가던지, 시간을 때울 게 필요해서 찾다 보니 우표 박물관이 있었다.
무료입장에 와이파이도 되고 카페도 있다고 해서 10시 반 오픈시간에 맞춰서 그쪽으로 출발. 아침 10시가 되니 7시랑 비교도 안될 정도로 해가 쨍하게 떠올랐다. 멕시코 시티보다 동부로 갈수록 점점 더 더워진다는데 플라야 델 카르멘 날씨가 두려워졌다. 그래도 날씨가 좋으니 멕시코의 알록달록 예쁜 거리가 더 잘 보였다.
쨍한 해 덕에 슬슬 힘이 빠져가며 도착한 우표 박물관. Museo de Filatelia de Oaxaca로 약어 MUFI라고도 한다. 이 박물관은 1996년 오아하카 그래픽 아트 연구소에서 열린 알프레도 하프 엘루(Alfredo Harp Helú) 소장품 우표 전시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랑 같은 해에 시작되었다니 더 감회가 새롭다. 이 박물관이 30년 동안 성장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는 동안 나도 그래왔는지 잠시 생각..(?) 지금의 모습을 갖춘 건 2001년이라고 한다.
시간을 때우려고 온 거였는데 생각보다 본격적이고 전시가 알차고 공간들도 잘 꾸며져 있어서 좋았다. 무료인데 뭔가 차분하고 친절하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달까. 입구에 있는 라커도 무료! 큰 가방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입구에는 세계의 우표들이 붙어있다. 북한의 우표까지 볼 수 있다는 게 이 우표 박물관이 얼마나 우표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 지도를 축소해서 작아진 섬나라들까지 다 우표를 붙어둔 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우표란 마음을 보내는 수단 중에 가장 낭만 있는 것. 그런 낭만을 넘어서 시대를 조망하고 세대의 추억을 공유토록 하게 설계된 박물관이었다. 특히 태국의 불교를 테마로 한 전시(확실하지 않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내 마음에 드는 우표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 말고도 야구를 테마를 한 전시도 있었다.
'수집'이라는 건 단순이 무언가를 모으는 일인데 그것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게 참 신기했다. 우표라는 것 자체도 예쁜 것들이 많은데 그걸 모아 작품을 만드니 거대한 세계가 된다. 게다가 이런 걸 모으려면 그 대상 자체에 대한 애정을 지속하는 지구력도 필요하다. 나도 옛날엔 수집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뭐든 한 분야에 꾸준히 최선을 다해야 세계가 되는구나.
처음에는 들어가자마자 있는 공간이 끝인 줄 알았다. (불교, 야구, 우표로 만든 작품 전시관, 기념품 판매점) 그런데 뒤쪽으로 넘어가니 더 공간이 많았다. 그늘도 지고 쉬기도 편하게 되어있다.
그늘 아래 앉아 바람을 좀 맞았다. 와이파이도 되고 그늘이 있는 벤치들도 있고 시간 때우려고 온 건데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곳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뒤쪽 건물로 가면 우표를 수집해 놓은 곳, 카테고리 별로 묶어놓은 곳, 우표로 래핑을 한 자동차 등등 공간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박물관 전역에서 와이파이가 되기 때문에 찾아보니 우리나라 88 올림픽 기념우표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나도 찾아봤다.
'수집'도 맥락을 만들면 예술이 된다. 우표라는 가치를 넘어 우표가 만들어질 때의 아이디어부터 생산과정 모든 것을 예술로 칭하는 감수성에 감동해서 피곤하고 안 씻어 찝찝한 와중에도 열심히 구경했다.
우표 박물관 관람이 끝났을 때가 12시쯤, 그래도 1시간이 남아서 아까 박물관 와이파이로 찾아본 아이스 아메리카노 파는 카페로 이동했다. 우리 숙소에서 바로 다음 골목이라 거기서 1시까지 있을 생각으로. 꽤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비주얼로 나온다.
입구 쪽 자리에 앉아서 보니 많은 방문 판매 상인들이 오고 갔다. 식당 측에서도 딱히 제재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구아버를 파는 아저씨는 뒤에 자루를 백팩처럼 메고 다니셨는데 그게 만화 캐릭터 같아서 귀여웠다. 멕시코에 보름 정도 있으면서 느낀 건 멕시코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구걸하기보다는 그래도 뭔가를 팔고 돌아다니는 게 당연해 보인다는 거였다.
몸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눈에 엄청 많이 띄었는데 오히려 장애가 있다는 것이 차별되는 부분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팔한쪽과 양다리가 없는 사람들도 휠체어에 타고 무릎에 젤리나 껌 같은 걸 상자에 담아 조금씩 팔면서 돌아다니는 걸 많이 봤다.
1시가 되어서 다시 호스텔로 갔다. 숙소 리셉션 스태프는 아까 만났을 때는 몰랐는데 되게 친절하고 웃는 게 예뻤다. 내가 1층 침대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을 했었는데 당연히 가능하다며 1층 침대를 내어주었다. 이번 숙소는 여성 6인 도미토리, 1박에 세금포함 1만 2천 원 정도다. 처음에 1박만 예약하고 왔는데 이 상태로 내일 야간 버스를 타기도 좀 힘들 거 같고 아까 우표 박물관에서 찾아보니 꽤나 와하까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서 호기심도 생겼기에 1박을 추가했다.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데 아시아인 여자가 들어왔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일본에서 왔다고. 그 친구는 와하까에서 3주 정도 머물면서 어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나는 와하까에서는 2박만 머무르고 산크리스토발 데 라 까사스로 넘어가서 어학원을 다니게 될 거 같다고 하니 그 지역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아마 나라마다 유명해지는 지역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거겠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일단 샤워를 했다. 다행히도 따듯한 물도 잘 나왔다. 하루를 푹 절은 옷들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빨았다. 과나후아토에서 잠시 잊었던 빨래 지옥이 다시 시작되려 한다.
씻고 나니까 피로도 훨씬 가셨다. 옥상에는 빨래를 널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빨래를 널어놓고 쉬었다. 씻고 나니 개운하고 보송보송해서 그 상태로 조금 있고 싶었다. 침대에서 좀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어디라도 갈 참이었는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빨래를 걷으러 올라가니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실 이런 날씨는 매우 반갑다! 오늘 안 나갈 핑곗거리가 확실히 생겼으니 말이다!
아껴두었던 햇반 한 개와 미트볼을 꺼냈다. 거기에 오늘은 장거리 이동하느라 힘들었으니 라면 티백도 하나. 역시 한국 사람은 쌀을 먹어야 해.. 산크리스토발에서는 그래도 일주일 정도 머무를 수 있으니 냄비밥을 도전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나 오늘도 국물 욕심을 내는 바람에 맛이 너무 심심해서 라면수프를 반 정도 또 털었던 식사. 햇반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좋았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기에 그냥 숙소 식당에서 노트북을 켜고 13일 치 정산을 했다. 예산을 짰던 거보다 한 5만 원 정도 덜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산을 넉넉하게 짜두었던 거라 생각보다는 체감상 많이 쓴 기분이었다. 그래서 돈을 아낄 방법을 찾다가 버스 수수료라도 아끼자 싶어서 ADO버스 사이트에 접속해 봤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처음 멕시코 시티에서도 접속이 안 됐었는데 오늘은 접속이 됐다. BUS BUD에서 1000페소 조금 넘게 예약할 버스가 여기서는 할인 중으로 830페소였다! ADO버스는 자리 일부를 일정 날짜 전에 최대 반값까지 할인하는 프로모션을 많이 한다고 한다. 산크리스토발행 버스표를 얼른 끊었다.
이제 현금도 다 써가서 현금 정산도 했는데 기가 막히게 (물론 화장실 이용한 작은 단위까지 기록했으니까) 남은 페소가 거의 딱 맞았다. 신기했던 건 한 7페소 정도가 더 있었다. 누군가가 거스름돈을 더 준 건가..? 모자라는 것보다는 낫지. 거스름돈을 일일이 잘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양심적인 멕시칸들만 만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비도 추적추적 오고, 아무래도 버스에서 제대로 잔 게 아닌지라 피로가 쌓인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