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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Day17. 이곳은 제 무덤이 될까요?

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 구경, 로컬 시장, 포쉬(POX)

by SUNPEACE

6/13_ 중남미 Day17



오늘은 여행 이래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처음 눈을 떴을 땐 8시쯤이었는데 몸이 으슬으슬하고 피로도 가시질 않아서 10시까지 더 잠을 잤다. 눈을 뜨고도 30분은 미적거리고 나서야 배가 고파 침대에서 벗어났다. 어젯밤 쌀을 불려놓고 잠에 든 터라 아침부터 드디어 햇반이라는 사치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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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해보는 냄비밥, 엄마랑 통화한 대로 강한 불에 끓을 때까지 기다리고 끓어오르면 중불로 줄이고 쌀을 휘적휘적 저었다. 그러고는 약불로 줄이고 10분. 10분이 다 되어가도 뚜꺼이 없는 탓인지 쌀이 설익은 느낌이라 급하게 물을 추가하고 접시하나를 덮어두었다. 2분 정도 후에 아예 불을 끄고 5분 정도 뜸을 들였다. 밥이 좀 질긴 하지만 된밥은 죽어도 못 먹고 평소에도 밥을 질게 하는 터라 꽤나 만족스러운 첫 냄비밥을 감히 대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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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두 개를 깨어서 프라이를 만들고 간장계란밥을 만들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은 간장이었다. 아시안 코너 쪽에 간장들이 초밥 간장이라 양념장 코너에서 간장을. 그나마 초밥 간장 아니게 생긴 걸 집어온 건데 그래도 그게 초밥 간장이었던 거다. 어린이 수저를 챙겨 온 탓에 크기가 아무리 작다 쳐도. 5번을 넣었는데 짜지기는커녕 달달해지고 있었다.


그런대로 첫 냄비밥 성공과 첫 간장계란밥은 맛을 넘어서서 꽤나 감동이었다. 멕시코 계란은 노른자 맛이 엄청 진해서 내가 기대하던 간장계란밥과는 다르게 살짝 노른자의 느끼함과 초밥간장의 달달함으로 결국에는 이국적인 맛이었지만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밥은 꽤 넉넉히 해서 저녁과 내일 아침까지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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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는 씻으려고 하는데 생각해 보니 내 수건은 어제 빨래들과 옥상에 널어두었다. 수건을 거두어 오는데 수건 말고는 마른 게 하나도 없었다. 어젯밤에도 아마 비가 왔을 테니까. 어제 자기 전에도 느꼈지만 여기는 습하고 방 침대에 누우면 습기 냄새(약간의 곰팡이 느낌)가 좀 났다. 게다가 바람이 한번 부니 빨래가 아주 휘날리고.. 아니나 다를까 또 비가 올 거 같았다.


우선은 씻고 다시 옥상에 올라가 보니 두 남자가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곧 빗방울 떨어질 거 같은 날씨에도 여유를 찾는 사람들은 역시나 있구나. 그런 와중에 결국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오늘 스페인어 학원을 등록하고 수업을 하나 들어볼 생각이었는데 이 상태로 산크리스토발에서 여러 날을 더 머무는 게 맞는지 진짜 의문이 들었다. 날씨가 안 좋은 것도 정도껏 안 좋아야지, 우기인 걸 알고 왔지만 이렇게 폭우의 연속은 좀 감당하기 힘들 거 같단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일찍 멕시코 여행을 마무리하고 벨리즈로 넘어가야 할지,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다 비가 아직도 오나 입구에 확인하러 나가는데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다. 어제 수잔이 여기에 한국인 남자 있다고 한 게 이 아저씨인가 보다.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안 바쁘면 커피나 마시자고 해서 커피를 내리고 마주 앉게 됐다. 본업이 무엇이신지는 몰라도 아프리카, 남미도 여러 번 다니시는 진짜 여행 가셨다! 산크리스토발에 오래 있을 작정으로 오셨다가 별로 재미를 못 느껴서 오늘 다른 도시로 떠나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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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으러 갈 참이었다고 말동무해달라고 해서 어쩌다 보니 동행, 가게가 꽤나 멋져서 나도 아저씨랑 같은 Sopa Azteca(소파 아즈테카)를 먹었다.


닭으로 우린 듯한 육수에 치즈랑 아보카도 같은 진한 맛이 있어서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반절 넘게 퍼먹을 정도. 치즈도 덕에 더 진한 풍미가 있고 꽂혀 나온 나쵸 같은 토르티야 튀김도 바삭하면 바삭한 대로 눅눅해지면 눅눅해지는 대로 맛있었다. 가격도 50페소니 정말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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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면서도 많은 얘기를 하고 산책을 더하러 시장으로 가봤다. 시장은 팔찌나 옷 이런 기념품들을 파는 기념품 구역이랑 현지인들이 장 보는 진짜 시장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기념품은 그다지 관심 없었는데 로컬시장으로 넘어가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구경할 맛이 났다.


닭들이나 정말 정갈하게 정리된 약재들, 과일가게, 담배 판매점, 화장품 판매점, 생필품 등등 진짜 여기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건 다 팔고 가격도 월마트보다 훨씬 저렴했다. 담배 판매점에 호기심에 가격을 물어봤는데 디스가 고작 25페소, 현지 담배는 10페소짜리도 있다.


나는 토달볶을 해 먹으려고 토마토 4개를 15페소 주고 샀다.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누가 나를 아는 척했다. 나를 여기서 알 사람이 없는데 하고 무심결에 보니 어제 같이 입실한 일본인 부부였다! 반갑게 인사하고 아직 같은 숙소 있는 거 맞냐고 하니 맞다고 해서 이따 봐~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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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돌아오는 길엔 행진도 봤다. 지역행사는 아닌 거 같고 어디 클럽에서 주도적으로 하는 행사처럼 직원들처럼 옷을 차려입은 애들이 있었다. 큰 인형은 다행히(?) 둘이 어깨 타기를 한 게 아니라 한 명이 만세를 하고 있는 듯했다. 뒤따르는 사람들도 춤을 추며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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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산크리스토발을 쏘다니고 나니 살아보기엔 괜찮은 거 같았다. 배낭여행자의 무덤이라는 별명까지는 아직 안 와닿았지만 스페인어 잠깐 배우는 시간 정도는 할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부킹닷컴으로 일단 2박을 연장했다. 2박에 1만 4천 원이라니, 다시 봐도 놀라운 가격이다.


사실 원래는 다른 숙소를 가고 싶었는데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호기심에 2박을 예약해 본 거였다. 근데 하루 꼬박 머물러보니 숙소가 꽤 정감 있고 좋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아까 싸다 만 짐을 마저 챙겼다. 다행히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고 싶었던 식량 라면 4개랑 커피, 햇반 하나, 하이라이스 하나 이 정도는 배낭의 뚜껑에도 수납이 가능했다. 그러고는 잠시 누워 쉬고 있는데 누가 방 문을 노크했다.


어제 “내일 포쉬 같이 마실래?”했던 수잔이었다. 그냥 으레 그런 말을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2분 뒤에 나와! 주방에서 포쉬 먹자!라고 했다. 안 그래도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볼까, 노트북을 들고 공용공간에서 작업을 해볼까 하던 참에 너무 반가운 기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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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더니 수잔은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포쉬 먹을 사람 주방으로 와라~ "했던 건지 잔을 4개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나처럼 발 빠르게 온 사람은 없었다. 포쉬는 스태프 전용 찬장에 있는 건지 수잔은 잠시 직원을 기다리다가 "그냥 내가 꺼내야겠다!" 하면서 포쉬를 꺼내서 따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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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지만 수잔이 '내일 같이 포쉬 마시자!' 했던 이유가 호스텔의 요일별 행사 중 금요일이 <포쉬 마시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월요일엔 벽난로에 마시멜로우 구워 먹기, 화요일에는 영화, 수요일에는 토르티아 만들기, 목요일에는 언어교류 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직원 전용 찬장에서 포쉬를 자연스레 꺼내 마신 것! 근데 오히려 너무 사교적인 호스텔은 개인적으로 기 빨려서 혼자 힘든데 이 정도의 적절한 분위기가 뭔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포쉬는 원래 치아파스 주에서 종교행사 할 때 쓰는 술로 옥수수로 만든다고 한다. 원래는 도수가 높은데 사람들이 편하게 마시려고 30-35도 정도 되는 정도로 많이 팔고 만든다고 한다. 집에서 만드는 거 말고 거리에 가면 초콜릿맛, 무슨 맛 등등 여러 가지 맛을 첨가한 것도 마실 수 있는데 가격이 엄청 저렴해서 여러 맛을 맛봐도 100페소가 안 든다고(진짜일까?) 했다. 워킹투어에 참여하면 마지막에 포쉬를 먹고 끝낸다고 꼭 참여해 보라고 추천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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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은 직원이 가지고 있는 포쉬 말고도 자기 개인소장 술이 여러 개 있어서 두 가지를 더 맛 보여줬다. 그리고 어제 숙소 주방 찬장에 술병이 참 많구나 생각했던 것도 수잔이 5년 동안 여름쯤에 와서 한 달 정도 여기에서 지내는데 지난 2년 정도 추억 삼아 모아둔 술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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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침대. 어떻게 이 사진을 찍었을까요?

또 더더 생각보다 신기한 건 내 방인 여성 도미토리 6인실에 6번 침대 (나는 2번 침대다)에는 옷을 걸 수 있는 후크도 있고 스마트폰 거치대도 있고 뭔가 더 섬세하게 정비된 느낌이라 그 침대가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후크도 수잔이 단거였다. 이번에는 단독실을 쓰지만 보통은 매년 6번 침대를 달라하고 그 침대를 써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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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술을 좀 마시고 있는 동안 호주인 할머니 (내 바로 옆 침대다, 매번 문을 잘 못여셔서 내가 방에 있을 땐 늘 열어드렸다)는 타코를 요리 중이셔서 같이 얘기를 나눴는데 그분은 여행하면서 그 지역 요리를 배우는 걸 좋아한다고 하셨다.


수잔은 "애들도 다 키웠는데 또 요리하기 귀찮지 않아??" 했지만 그분은 요리하는 게 재미있다고 하셨다. 근데 이제 "애들한텐 안 해주고 자기가 해서 자기가 먹어서 재밌는 거 같기도.."이런 농담도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든 타코를 우리에게 하나씩 먹으라고 주셨다.


이때도 웃겼던 게 수잔이 한참 나랑 수다 떨다가 "근데 꼭 이건 손으로 찹슬라이스 해야 되나 봐~?" 했는데 "아니.. 그게 제일 귀찮지" 대답한 호주 할머니한테 "그럼 말하지 내가 여기 사두고 간 다지기가 있어!" 하면서 어디선가 뚝딱 꺼내주었다. 호주 할머니가 엄청 행복해하며 내일은 이걸 써야겠다며 좋아하셨다.


타코는 사 먹었던 타코들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무래도 재료들도 신선하고 치즈 같은 걸 더 넣어줘서 그런 가보다. 미국인 여자 친구랑 멕시코 현지인 친구 두 명, 오며 가며 스태프도 합류해서 같이 술을 먹는데 수잔이랑 미국인 친구 말고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남미로 넘어가면 더더 영어가 안될 텐데 여기서 어쨌든 스페인어를 좀 배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예의상 한잔씩만 받아서 먹었는데 나만 계속 받아마시니까 수잔은 너무 좋아하며 아이러브 코리안, 코리안 러브 드링크 이러면서 너무 좋아했다. 나도 과나후아토에서 가져온 테킬라를 꺼내와서 나눠먹자고 한잔씩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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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택배도 왔다. 수잔이 테무에서 시킨 것들. 아무래도 여기 스태프들이랑 유대감이 정말 깊은지 스태프에게 줄 신발이랑 옷도 같이 주문했었다. 수잔은 원래도 테무를 즐겨 쓰다가 더 이상 미국에서는 테무를 못 쓰기에 멕시코에 있는 동안 맘껏 쓸 거라고.. 그러면서 손에 끼우는 채칼도 두 개를 주문했다며 스태프에게 "하나는 여기에서 써~ 하나는 내 개인용이야!" 하면서 하나를 나눠주고 이것저것 호스텔에 쓸 것들을 꺼내주었다.


그 외에도 수잔의 아이템은 사우디아라비아 여행을 할 때 무릎을 가려야 할 때 입을 가운 같은 숄, 더운 지역 여행할 때 필요한 목걸이형 선풍기 등등이 있었다. 어제 수잔의 방에 전자레인지 돌리러 갔을 때 본 자동 점등 무드등도 테무에서 주문한 거라며 작은 것에 정말 행복해했다. 수잔이랑 짧게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참 멋있고 재미있는 사람을 알게 된 거 같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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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마무리되고도 나는 아직 적적해 나 혼자 과나후아토에서 사 온 데낄라를 마저 홀짝이며 생각했다. 누군가가 어떤 장소가 좋아서, 또 사람이 좋아서 매년 한 계절을 5년이나 보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나에게는 그만큼의 감동은 없더라도 내가 알게 되고 멋있고 재밌다고 느낀 사람이 좋아하는 장소라면 나도 그 장소에 지낼만 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더 지내보자고 결정을 내렸다.


여행은 정말 장소가 다가 아니라 사람이 다 하는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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