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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Day16. 폭우 속에서 만난 새로운 마을

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월마트, 총소리

by SUNPEACE

2025_6/12


어젯밤 10시, 와하카를 떠나 산크리스토발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타자마자 잠들어 새벽 3시쯤 추워서 일어나니 사람들 몇몇이 내리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아마 이렇게 멈췄을 테지만 너무 잘 자서 몰랐다. 추워서 비치타월 챙겨 온 걸 꺼내고 보니 옆자리 아저씨도 빈자리를 찾아간 건지 내리신 건지 안보였다.


춥고 불편해서 편한 자세를 찾느라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다시 잠들었다.


자다 깨다 하는 중 어딘가 멈춰서 보니 해가 떠있고 7시고 톡스틀라였다. (산크리스토발 바로 옆 도시) 여기에서 한참을 정치했다가 출발했다. 아마도 기사님의 휴식시간인 듯. 그리고 화장실 청소도 이때 하더라.


아침이 되니 사람들도 거의 내렸고 내내 꺼져있던 화면에서 광고도 나오고 영화도 나왔다. 나도 화장실도 다녀오고 하니 완전히 잠이 깨서 과자를 까먹고 어제 타온 커피도 마셨다. 바깥 풍경을 좀 보면서 남은 시간을 달리는데 가는 길부터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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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크리스토발에 도착. 원래 이름은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óbal de las Casas)이다. 물가도 저렴하고 배낭 여행자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 멕시코는 대체로 색을 과감하되 조화롭게 쓰는 마을들이 많은데 산 크리스토발은 또 평지로 이루어져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역시나 이곳도 아침 9시도 안 됐는데 해가 쨍하니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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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Abuelita Hostel. 무려 2박에 만 사천 원이라는 기적의 가격에 도달한 호스텔이다. _사실 이마저도 여성 도미토리룸 가격이고 처음에 도미토리룸이 2박 1만 원 대로 올라왔었다


도착해서 짐을 맡기는데 아까 버스에서 내릴 때 동양인인데 한국인은 아닌 거 같고 긴가민가 했던 부부가 있었다. 들어가니 그쪽도 긴가민가하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곤니찌와..?" 이렇게. 웃으면서 "헬로 코리아" 하니까 반가워하면 "아~ 칸코쿠진데스~" 이러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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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부랑 무슨 얘기를 하던 일본인이 바구니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알고 보니 셋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 그 일본인은 아침마다 오니기리를 만들어서 방문판매 하고 있던 거였다. 무언갈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잎에 곱게 싼 오니기리가 참 귀여워서 결국 한 개 샀다.


그 부부도 하나씩 샀는지 거실에 앉아서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3개월 전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세계 여행을 떠나온 것이라고 했다. 나도 23살 때 여행하면서 신혼여행으로 세계여행하는 부부들을 보며 잠깐이나마 꾸었었던 꿈, 그래서 멋지다고 응원한다며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누며 오니기리를 먹었다.


오니기리는 정말 일본인이 일본스럽게 만든 느낌. 무언가 과하지도 않고 심심하다 싶고 (일본에서 먹을 때도 속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 생각을 했었거든) 그런데도 정성이 절대 빠지지는 않는 오니기리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침마다 오니기리를 만들고 판매하면서 이곳에 정착을 하는 건지 장기로 여행을 하는 건지 그의 사정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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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한 시간쯤 더 시간을 보내다 11시에 밖으로 나왔다. 체크인이 2시라고 해서 그전에 스페인어 학원 가격도 알아보고 월마트에 가서 한국 라면과 초밥용 쌀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스페인어 학원 <La Casa en el Árbol Instituto Cultural>에 가봤는데 카페에서 봤던 금액보다 저렴했다. 15시간 수업을 들으면 한 시간에 190페소! 만 오천 원도 안 하는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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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우선은 월마트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아기자기 마을이 예뻐서 놀랬다. 날씨도 습하지 않아서 해는 뜨거웠지만 괜찮았다. 벌써부터 이 작은 마을이 마음에 들어오는 기분!


IMG_2234.JPG 이거 다음에 온 콜렉티보에 월마트라고 적혀있었다.

콜렉티보를 탈 수 있다는 곳으로 걸어가다가 월마트가 적힌 콜렉티보가 마침 오길래 타도 되냐고 하니까 타라고 해서 탔다. 콜렉티보는 조용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햇볕은 장난 아니었다. 40분이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이지만 이 날씨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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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사람들 (눈만 마주치면 ^_^ 하다가 월마트에 내리라고 알려줌)과의 동행이 끝나고 월마트 도착. 우선은 구경을 좀 하다가 네임펜 하나를 골랐다. 대부분 호스텔에 자기 이름 표시하라고 하면서 네임펜은 또 없어서 겸사겸사 샀다.


두 번째론 샴푸를 사러 갔다. 샴푸를 결정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거의 40분은 고민했다. (고민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85페소짜리 600미리를 살지, 300미리 65페소를 살지-가지고 다니기 편하니까-근데 그러면 너무 금방 쓸 텐데 그럼 바디워시를 따로 살지, 바디워시를 사지 말고 뷰티바를 살지, 뷰티바를 사면 비누곽도 사야 되는데 찾아보다가 크기가 안 맞아서 300미리 샴푸랑 400미리 바디워시까지 들었다가 결국에는 두 개 챙기느니 큰 거 한 개 챙기는 게 낫다며 600미리짜리 샴푸를 집어온 엔딩..)


고민하다가 중간에 월마트가 정전되기도 했다.(이때 얼른 집에 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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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 물가 참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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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고민 코너는 라면 코너.. 멕시코 시티는 너무 금방 한국에서 날아온 느낌이라 라면을 사기 좀 억울해서 안 샀는데 이쯤이면 사도 되지 않나 싶었다. 불닭 45페소, 짜파게티 40페소, 라면 35페소가량.. 보통 이런 대형 마트 아시아 코너는 택 관리가 잘 안 되어있어서 혼돈되기 쉬운데 기계에 찍어보면 가격을 알 수 있다. 고민 끝에 까르보불닭 1개, 짜파게티 2개, 신라면 1개, 열라면 1개, 일본 라면 1개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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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망의 쌀….! 산크리스토발에서는 냄비밥에 꼭 도전해보리라 다짐했었다. 옛날에도 쌀을 찾아 여행 다니기는 했지만 정말 30대에 접어들어가는 건지 쌀밥을 먹지 않는 게 뭔가 힘들다고 느껴졌다. 잠깐 알아보니 안남미나 리소토용 쌀 말고 초밥용 쌀을 사야 찰기가 있는 밥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쌀 코너에서 벗어나 다시 아시안 코너로, 초밥용 쌀은 멕시코시티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아시안 코너에 있었다.


_쌀을 고르는데 전등이 자꾸 깜빡거리는 게 오늘 월마트 전기 상태가 안 좋구나 생각했다.


간장도 사고, 이쯤 되니 기가 빨려서 간식 겸 점심 겸 먹을 야키소바 하나 추가 해서 계산하러 갔다. 셀프 계산대 이용하는데 맥주 인증해 주러 온 아줌마가 네임펜 찍은 거 맞냐며 추궁했다. 내역을 제일 위로 올려 여기 있잖아. 했더니 어디 있냐며 내역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러다 발견하고는 머쓱해하길래, 왜? 다 꺼내줘? 체크해 볼래? 하니까 됐다며 인증해 주고 사라짐.. 계산 다하고 나가려고 하니까 굳이 다시 와서 멋쩍은 미소로 잘 가라고 하는 거보니 본인도 머쓱했나 보다. 이 정도의 액션만 있어도 나는 기분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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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오니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경험상 이렇게 내리다가 30분 정도면 그치기에 그냥 기다려 보기로(그러지 말걸..) 기다리니 역시 빗줄기가 얇아졌다. 하늘도 맑은 게 비가 더 올 거 같진 않아서 콜렉티보를 타러 갔다. 역시나 10페소 내릴 때 내면 되고 비 그치는 거 기다릴 때랑 버스랑 귀여운 아기들이 참 많았다. 돌아가는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귀여운 아기네 가족들과 같이 내려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1분. 한 10걸음쯤 떼었나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이내 도무지 걸어가기 힘든 폭우가 쏟아졌다. 일단 야외 테라스가 있는 식당 가림막 아래 비를 피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우산 장수들은 바삐 우산을 사라며 호객을 하고 다녔다.


불행히도 내 가림막은 비가 줄줄 새고 있었다. 그래도 아예 맞는 거보다는 나아서 비를 어째 피해 한 20분쯤 지났을까, 나랑 같은 가림막에 있던 아저씨가 엄청 눈도 빨갛고 횡설수설해 보였는데 건너편에 건물 가림막에 있는 가족들한테 가서 거기서 비 좀 피하자고 했는데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근데 거기도 6명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는 마구 소리 지르기 시작, 그냥 안 보이는 척하고 있으니 내 옆쪽으로 좀 가까이 왔는데 엄청 가까운 것도 아닌데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우산 장수에게 부탁해서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 중에 10대 소녀들이 지나가길래 부탁을 했다. 저분이 너무 많이 취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한다, 같이 있기 무서우니 저기 앞까지만 가달라고 하고 앞쪽의 다른 지붕으로 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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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숙소까지는 단 6분 거리. 그런데 이 비를 뚫고 갈 자신도, 100페소를 주고 우산을 살 여유도 없었다. 우산이 없으면 모를까 어차피 짐이 될 텐데.. 내가 자리를 옮긴 가림막 아래에도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길을 건너야 하는데 아마 여기든 아래 골목이든 다 똑같을 거라며 한참 기다리기를 마음먹은 거 같았다.


나도 처음 비를 피하는 장소를 포함해서 1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처음 비 맞은 게 말라가면서 너무 추워지고 비는 그칠랑, 하다가 다시 폭우로 바뀌었다. 너무 추워서 도무지 견디기 힘들어 결국엔 살짝 멎는 느낌이 들자마자 아주머니에게 (함께 50분은 기다린,,) 저 가볼게요 하고 서로 치얼업 해주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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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분 동안 비는 역시 쏟아졌고 당연히 쫄딱 젖었지만 그래도 숙소로 오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다 젖은 채로 체크인을 하고 얼른 씻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거 같더니, 또 나오지 않았다. 오늘 감기에 걸리겠구나 예감했다. 내방은 1층 리셉션 바로 옆 방, 오래되고 기대감이 드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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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씻고 젖은 옷들과 빠는 김에 가방과 신발도 빨아버렸다. 마당에 널 장소가 다 차서(모두 젖은 옷을 말려야 했으니까) 테라스에 올라가 보게 됐다. 밤에도 비예보가 있어서 과연 내일까지 마를까 싶지만.. 우선은 할 일은 끝.


IMG_2301.JPG 성공적인 사냥

배가 너무 고파서 컵라면(야끼소바)을 만들어서 맥주 한 캔과 먹기로, 호스텔 주방에 있을 게 다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 전자레인지가 안보였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할머니 한분이 나오셔서 "너 뭐 찾고 있니" 물어보셨다. 전자레인지 찾고 있다고 하니 자기 방에 있다고 따라오라고 하셔서 가보니 개인실에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IMG_2215.JPG 마당을 지나가면 개인실들이 있다.

알고 보니까 원래 호스텔 주방에 있던 전자레인지인데 사람들이 하도 막 써서 너무 자주 고장이 나는 바람에 스태프들이 그 전자레인지를 치우려고 했단다. 그래서 자기 방에 두고 쓰고 종종 사람들에게 빌려준다고 하고 자기 방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5분 동안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동안 얘기를 했는데 군대의 일로 한국에서 1년 정도 일을 하셨단다. 대구에서 거의 대부분, 그리고 서울 근처에서 몇 달 일을 했는데 내가 울산사람이라고 하니 자기가 대구에서 일할 때 쉬는 날이면 울산이나 부산에 가서 놀았다고 하며 반가워하셨다.


일할 때는 여유가 없어서 그냥 저녁에 소주 마신 추억밖에 없다고 한국을 많이 못 느껴봐서 아쉽다고 했다. 소주문화를 알면 한국을 반절은 아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ㅋㅋㅋ 그러면서 언젠가 다시 여행으로 한국에 갈 것이라고!


나중에 알았지만 할머니는 70세셨다. 그 나이에 여기저기 여행 다니시는 게 너무 멋있다고 느꼈다. 심지어 여기서 전기 자전거도 타고 다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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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전자레인지를 써서 야끼소바를 만들어서 먹고 맥주도 큰 거 한 캔을 다 먹었다. 그래도 피로 탓인지 허기가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한 7시까지 좀 쉬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밤을 새우고 오면 억울한(?) 어떤 마음에 굳이 맥주를 먹고 자던 그 버릇이 아직 남은 거다.) 그래서 겸사겸사 밤 분위기 살필 겸 4분 거리 슈퍼에 계란과 맥주를 사러 갔다 왔다.


슈퍼에 가니 월마트는 한국라면이나 초밥용 쌀 같은 특수한 게 필요할 때가 아니면 갈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동네 슈퍼 물가가 훨씬 저렴했다!


밤이 되니 쌀쌀한 산크리스토발. 조용한 거리에 총소리가 계속 나서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이 동네가 비가 많이 와서 비가 오지 말라고 대신 천둥소리를 낸다는 의미로 폭죽을 터트리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산크리스토발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날씨 때문에 그 마음이 지속되지 못하면 너무 아쉬울 거 같다. 내일은 부디 날씨가 맑기를 바라면서 피곤한 하루를 얼른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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