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 어학원 등록, 플리마켓, 초코라테
2025_6/14
오늘도 늦잠을 잤다. 매번 8시 전에 일어나다가 산크리스토발의 두 번째 아침까지 10시에 일어나다니, 여기가 나의 마음이 편한 건가, 딱히 정해진 일정이 없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계속 덥게 자다가 살짝 쌀쌀한 날씨가 잠을 자는 데 도움을 준 거 같기도 하다.
우선은 오늘도 어제 냄비밥 해둔 거랑 토달볶을 해 먹었다. 토마토 착착 썰어서 볶다가 계란 2개 (오늘은 3개 사치를 부렸지만)를 넣고 휘휘 볶다가 소금 살짝 넣으면 끝. 한국에서는 너무 건강한 느낌(?)이라 안 해 먹었는데 이번에 먹으니까 너무 맛있었다.
토달볶이랑 밥 야무지게 먹고 저녁에는 라면을 끓여 먹을 생각이라 저녁에 말아먹을 밥도 조금 남겨놨다. 계란 15개를 사면서도 남기지는 않겠지 고민했는데 오히려 밥을 잘해 먹고 있어서 모자랄 일을 걱정해야 될 판이다.
밥을 먹고 빨래를 확인하러 올라갔다. 오늘은 해가 쨍쨍하게 뜬 산크리스토발, 해가 뜨니 너무 예뻐서 2박 연장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비 그친 뒤 살짝 흐렸던 산크리스토발을 산책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비만 내리치지 않으면 살기 참 좋은 동네 같았다.
어제부터 스페인어 학원을 고민하고 호스텔 벽에 붙은 전단지로 다른 곳도 컨택해 봤지만 결국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간다는 아르볼(La Casa en el Árbol Instituto Cultural)로 마음을 정했다. 일단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다른 학원은 2시간 수업 기준 회화 1시간, 문법 1시간 이런 식으로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있던 반면 아르볼은 배정된 선생님과 대화하며 수업의 진도와 수준, 필요한 것들을 정하며 수업이 진행되는 식이었다.
나는 시험을 볼 것도 아니고 오래 수업을 들을 상황도 안되는 데다 간단하게 안부 인사 나눌 정도의 회화, 물건을 살 때나 길을 찾을 때 쓸 정도만 배우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친근한 상황의 수업이 더 잘 맞을 거 같았다.
하루에 2시간, 3시간을 들을지도 고민했는데 아무리 공부를 한다 쳐도 3시간은 여행자 입장에서 투머치라고 느껴져서 2시간을 아르볼에 가서 등록을 했다. 한국 사람들이 확실히 많은지 서약서(환불 규정이나 기물 파손 하지 않는다 뭐 이런 거 적힌 거) 한국어 버전도 있었다. 현금 2000페소로 결재를 하고 월요일 9시 수업 괜찮냐고 해서 원래는 11시쯤을 생각했었지만 오늘처럼 계속 기상시간이 늦어지는 것도 안 좋을 거 같아서 좋다고 했다.
2천 페소를 현금으로 계산하는 바람에 현금이 300페소 밖에 안 남아서 ATM을 찾으러 갔다. 수수료가 싸다는 inbursa는 걸어서 40분 정도라 그냥 수수료 30페소짜리 ATM을 찾아가서 3500페소를 추가로 뽑았다.
오늘은 카페에서 시간을 좀 보낼 생각으로 카페를 찾아 나서는데 걷다 보니 비가 안 오는 산크리스토발은 정말 좋았다. 이제까지의 멕시코처럼 덥지도 않고 선선하고 비가 그리왔는데 습하지도 않아서 날씨가 딱 좋았다. 눈에 담기는 풍경들도 내가 첫날 본 비 오는 날이랑은 비교가 안 됐다. 가다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다가 기시감이 들어 보니 첫날 내가 비를 피하던 곳이었다. 날씨에 따라 이렇게 풍경이 달라질 수가!
걷다 보니 공원에서 마림바 연주도 하고, 플리마켓 같은 것도 하고 있었다. 여기가 호박(보석)이 유명하다는데 귀여운 귀걸이가 있어서 가격을 물어봤더니 100페소, 비싸지는 않은데 여행 중 귀걸이는 잃어버리기 일쑤라 우선은 보류. 술도 시음했는데 캐러멜 포쉬 작은 병이 100페소란다. 커피 맛도 있어서 궁금했는데 왠지 시장에서 기념품용 포쉬를 본 기억이 나서 구매하진 않았다. (나중에 시장에서 같은 포쉬를 파는 걸 발견했는데 50페소였다.)
그러다가 플리마켓에서 초콜릿을 산처럼 쌓아놓고 팔길래 초코라테가 궁금해졌다. 와하카도 카카오로 유명하지만 산크리스토발도 마찬가지란다. 그래서 카카오 나티바(Cacao Nativa)라는 초코라테 체인점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 작은 사이즈를 먹으려고 했는데 직원이 "6페소 밖에 차이 안나~" 이러길래 결국 그란데 사이즈를 먹었다. 문제는 뜨거운 걸로 나왔다는 거. 내가 아이스로 시켰다니까 잠깐 기다리라 하더니 그냥 얼음 넣고 그 잘 못 나온 애를 부어줬다 원래 레시피가 저런 게 맞을까? 나의 의심 탓인지 맛은 있었지만 뭔가 밍밍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손으로 글씨 좀 쓰며 시간을 보내던 중, 많아야 7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양팔 가득 팔찌를 얹고 판매하러 다가왔다. 웃으면서 거절했는데 그 큰 눈으로 보는 게 마음이 쓰여서 눈을 좀 마주치고 얼굴에 묻히고 다니는 실밥도 뗴어주고 하니 하나만 사달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내가 나 팔찌가 이미 많아하고 보여주니 내 것도 예쁘니까 내 것도 해달라고(추정).. 그래서 얼마냐고 하니까 10페소란다. 안 믿겨서 계산기를 켜서 주니 <100x10>을 쳐준다. 아까 포쉬 얼마냐고 물어보면서 100을 쳐둔 게 있었는데 자기 딴에는 곱하기가 X라고 생각하고 <100x10>을 쳐준모양이다. 내가 지금 팔찌를 구매를 하는 게 저 아이의 인생에 크게 봤을 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어쩐지 그 눈망울이 자꾸 신경 쓰여 결국 2개를 샀다. 내가 팔찌를 사니 그제야 눈물 날 거 같던 큰 눈망울이 웃는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아이는 나가고 나는 글을 쓰고 음료도 먹고, 그러다 보니 뭔가 밖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첫날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날씨를 확인해 보니 4시에 비 예보가, 그때가 3시 40분 정도였는데 약간 도망치듯이 호로록 마시고 나왔다.
다행히 먹구름은 몇 조각 떠있지만 곧 비가 쏟아질 거 같지 않았다. 첫날 계란을 샀던 마트에 가서 햄 썰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서 파는 걸 샀다. 내일 토달볶에 넣어먹을 예정, 참치도 사고 싶었는데 먹게 될 때 또 와서 사야지.
10페소 계산하고 계산대 뒤에 보니 누가 봐도 현지인들 술 같은 게 있어서 물어보니 메즈칼이란다. 가격이 안 비싸서 다음 도시 넘어가기 전에 포쉬 대신 차라리 저걸 사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또 사러 올게 인사했더니 따봉을 날려주며 오케이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집으로 복귀, 커피를 내려서 마시며 정보를 알아보는 중 새삼스레 호스텔 참 좋게 느껴졌다. 인터넷이 빠른 것도, 무료로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지나치게 활달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사소한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개미는 좀 많지만 어쨌든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다들 해 먹는 분위기인 것도 좋다.
5시가 되어가니 또 누군가 요리를 시작했다. 구미가 당기는 냄새에 나도 밥을 할까, 고민했지만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지금 먹으면 밤에 잠들기 전에 배가 고플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나 한잔 더 하러 주방에 가니 입실 동기(?) 일본인 부부가 요리를 하고 있는 거였다. 어쩐지 구미가 확 당기는 냄새더라니! 반갑게 인사하고 언제 가냐고 물어보니 월요일에 떠난단다. 나는 다음 주 토요일까지 있을 거 같다고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말해줬다. 맛있게 먹으라고 인사하고 나는 커피를 마시며 마저 할 일을 했다.
해가 지고, 사람들이 점점 숙소로 돌아오고 있었다. 여섯 시 반쯤 나도 라면을 끓이러 주방으로 갔다. 내가 쓰고 싶었던 작은 냄비는 누군가 차를 내리는 용도로 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큰 냄비를 집어 들고 끓이기 시작. 역시나 물이 많았지만 괜찮다, 오늘은 왕뚜껑 스프와 원래 있던 스프 두 개를 같이 넣을 거니까! 그러기 위해서 아침에 밥을 조금 남겨놓은 거였다.
스프 두 개를 몸땅 털어 넣고 끓인 라면, 냄비가 커서 그릇으로 옮겨 담았는데 딱 맞게 들어간다! 그리고 즐거운 식사. 토요일이라 그런지 늘 혼자였던 식탁에 다른 둘이 더 있다. 호주인 할머니도 오늘은 같이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라면의 면도 다 건져먹고(멕시티에서 산 멕시코 라면이라 이미 많이 부서져 있어 거의 떠먹어야 했다.) 밥까지 말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먹었다. 닭 베이스 라면에 왕뚜껑 수프를 더하니 왠지 신라면 맛이 나는 거 같았다. 아마 둘 중에 하나만 있었더라면 심심했을 맛! 남겨둔 찬밥 덕에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일정을 다시 살펴보고 숙소도 알아봤다. 산크리스토발에서 가고 싶었던 숙소는 사실 마음에서 거의 잊혔다. 고작 3일째지만 지금의 숙소와 사람들과 정이 좀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숙소를 5박 더 연장했다. 계산해 보니 9박의 일정에 6만 8천 원을 결제한 셈이다. 숙소가 100프로의 만족을 주는 건 아니더라도 그건 여러 사람이 쓰는 호스텔의 특성임에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하루에 만 원도 안 하는 가격에 이렇게 내 몸하나 뉘이고 내 배를 채울 공간을 내어주는 일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카운터에 있는 스태프에게 숙박을 연장했는데 6번 침대로 옮길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월요일에 6번 침대가 나니 그날 옮기면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_6번 침대는 수잔이 작년 혹은 재작년에 머무르며 훅을 달고, 핸드폰 거치대를 달고, 또 화장실과 샤워실의 문쪽에서 떨어져 있는 여성 도미토리 룸에서 가장 좋은 위치의 침대이다.
오늘은 비가 안 오고 해가 나서 마을 구경을 제대로 했다. 맑은 날에 둘러보니 어제보다 더 좋은 곳. 어떤 여행지들은 첫눈에 빠져버리기도 하지만 이렇게 스며들듯이 빠지는 경우는 답도 없이 마음 깊이 남게 된다. 어쩐지 산크리스토발, 그리고 Abuelito hostel이 내 마음에 깊게 남을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