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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Day19. 볕 좋은 날엔 빨래를

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의 일상, 여행 중 빨래와 요리

by SUNPEACE

2025_6/15


산크리스토발에 온 뒤로 잠을 참 잘 자고 있다. 오늘도 9시나 되어서야 눈을 뜨고 그마저도 일어나기 싫어서 뒹굴 거린다. 멕시코 시티도 에어컨 없는 호스텔에서 더워서 깨고, 과나후아토는 아침에 식당 준비하는 맛있는 냄새에 깨고, 여기서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 이불속에 푹 들어가 나오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원래는 10시 무료 워킹 투어를 가려고 했는데 옥상에 가보니 신발이 뭔가 찝찝했다.


*산크리스토발에서는 매일 10시, 16시에 무료 워킹 투어가 있다. 따로 신청할 필요 없이 Plaza de la Paz에 시간 맞춰 가서 참여하면 된다. 무료라고 하지만 도네이션으로 팁을 내야 하고, 대부분 200페소를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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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크리스토발에 온 첫날 비가 왕창 쏟아지는 바람에 신발이 다 젖어 결국 빨았었는데 그다음 날도 비가 오고, 어제부터야 해가 났던 날씨 탓인지 겉은 말랐는데 만져보니 뭔가 축축하고 심하게 냄새가 났다. 전형적으로 빨래를 잘못 말렸을 때 나는 냄새처럼. 아마 첫날 빨아두고 둘 째날까지 내내 비가 온 게 원인인 거 같았다. 결국 신발을 한번 더 빨았다. 오늘도 해가 쨍하게 났으니 이번에는 부디 잘 말라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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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월마트에서 사 온 짜파게티를 개시했다. 한국에서는 굳이 귀찮아서라도 안 끓여 먹는 짜파게티, 해외에서 40페소나 주고 샀으니 잘 끓이고 싶어져 가스레인지에 딱 붙어 조리를 했다. 짜파게티가 이렇게 달달하고 강렬한 맛이었던가? 마음 가짐을 달리하고 끓여서 잘 끓여진 건지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정말 맛있었다.


냄비를 긁어먹을 기세로 짜파게티를 다 먹고, 후식으로 커피도 한잔 마시고, 씻고 옥상에 다시 올라가 봤다. 옥상은 올라가서 보이는 공간 말고 뒤쪽 공간도 있었는데 뒤로 가면 마을이 또 다 보였다. 이렇게 좋은 날, 산책을 안 나갈 수 없지. 크록스지만, 힘차게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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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크리스토발도 마을 자체는 작아서 이제 길을 다 외울 수 있을 거 같았다. 자주 가는 슈퍼에서 우측으로 꺾으면 시내 중심가가 나온다. 공원, 성당 거길 지나가면 레스토랑과 과일이나 기념품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는 거리, 또 그걸 지나가면 상시 기념품들을 파는 시장이 나온다.


광장 쪽으로 가는 길에 일본인 부부를 또 만났다! 아시안들이 많지 않아서 눈에 띄기도 하고, 그래도 아는 사람을 밖에서 아는 척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오늘도 공원엔 마림바 공연이 한참이고 어제와 달리 객원 멤버 춤추는 아기가 있었다. 귀여워서 구경을 하다가 시장 쪽으로 걸어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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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포쉬 50페소였다. 마그넷, 팔찌 등등 기념품 종류는 다 판다!

그저께 한국인 아저씨랑 같이 시장 구경을 하면서 옷들도 있고 구경거리가 꽤 있어서 오늘은 좀 꼼꼼히 구 경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시장이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일요일엔 노상 판매상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가?


그때 내심 마음으로 찜해두었던 도톰한 옷이 있었는데 직접 만드신 건 줄 알았더니 다른 옷가게에도 그 옷들이 색깔별로 걸려있다. 가격은 150도 불렀다가, 100도 불렀다가. 같은 디자인으로 아이들 거까지 있는 걸 보니 그냥 흔한 템인가보다. 그러니까 갑자기 흥미가 확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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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넷도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현지인들 시장으로 넘어가 봤다. 고기를 사고 싶었는데 꼬리뼈 통으로! 살 덩어리 통으로! 이런 식으로 올려진 걸 보니 뭐라고 주문해야 할지 감도 안 와서 그냥 패스.. 여기도 일요일이라 그런지 닫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입구로 들어가니 과일 가게가 많았다. 과일을 사 먹고 싶기도 했지만 다 한 바가지씩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졌다.. 이쪽 시장도 그날에 비해 닫은 곳이 많았다. 딱히 내가 살만한 건 없고 기가 빨려서 어디 구석 길로 들어가서 시장을 빠져나와 공원으로 돌아와서 그늘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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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스타벅스는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공원에도 둘둘, 가족들, 여럿이서 모인 사람들이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듯했다. 카페를 굳이 갈 필요 없지, 그냥 걸터앉은 채로 앉아서 사람구경을 했다. 그러던 중에 소녀 3명이 나를 쳐다보며 소곤거리다 한 명이 내게 다가와 "꼬리아?" 이렇게 물어봤다. 맞다고 하니 히히힛 웃고는 갔다. 또 잠시 후에 같이 사진 찍어줄 수 있냐며 다가왔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지, 같이 찍어주니까 "그라시아스~" 하면서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좋은 의미로 찍어간 거겠지?


그러고 나선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도 자기 핸드폰에 인사 좀 해줄 수 없냐고 해서 봤더니 어딘가에 영상 통화를 걸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그래도 여기 꽤 많이 살다 간다고 그러던데 그렇게 신기할 일인가..? 의아했지만 뭐, 이런 건 기분 나쁠 일도 아니다. 나름 재밌는 기억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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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니 3시 반쯤. 냉동실을 열어보니 역시 예상대로 얼음이 있었다. 얼음은 먹고 다시 얼려놓기만 하면 된대서 커피를 내려서 아이스커피를 했다. 아이스커피를 만드는 동안 잉글랜드에서 온 다니엘과 잠시 스몰 토크를 나누었다. 다니엘은 칸쿤에서 몇 년 살다가 일 때문에 결국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2주의 휴가가 생기자마자 다시 멕시코로 온 거라고, 자기는 멕시코가 좋다고 했다. 나도 산크리스토발에 오고 나서야 뭔가, 멕시코가 멕시코 답게 기억이 될 거 같단 생각을 했다.


엄청나게 나에게 감동을 주고 인상 깊은 순간들을 새기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여기서 보내는 일상들을 언젠가는 그리워하게 될 거 같다는 생각. 어떤 강렬한 기억과 추억은 정말 마음을 긁는 그리움을 안겨주지만 어떤 그리움은 높은 습도에 채 마르지 못하는 축축한 수건처럼 늘 마음 한 구석을 축축하게 하는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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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중인 다니엘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저 만들어 옥상으로 갔다. 옥상이란 공간이 있으니 좋다. 예전에 모로코에서도 하는 것 딱히 없이 하루를 보내도 그 기억을 그리워하는 건 날씨도 딱 적당했고 그늘도 진 옥상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였다. 그때가 그립다. 매일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고. 바람을 맞으면서 옥상에 그냥 앉아있을 때. 여행을 하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은 그런 거다.



IMG_0656.JPG 멕시코시티 텐트 시위 숲에도 빨래가 널려있다.

나는 햇볕이 쨍한 하늘 아래 좋은 냄새가 나는 빨래를 너는 일이 좋다. 심지어는 여행하다가 꼭 찍는 사진도 길거리에 널려있는 빨래다. 깨끗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마음이나 그걸 길거리에 덜렁 널어놓는 일이나, 그게 해를 찾으려고 애쓴 결과라면 더 재미있어진다. (대만의 여행이 그런 면에서 재미있었다.)


해가 잘 들고 건조한 나라라면 더 좋다. 빠짝 마른빨래를 툭툭 대충 털어 개어놓으면 생각만큼 유쾌하고 뽀송한 냄새는 나지 않지만 (그런 냄새는 보통 건조기 사용 후에 나기 마련) 그래도 ‘여행’의 냄새가 난다.


어떤 이는 빨래 맡기는 거 고작 몇 천 원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이 짓거리가 귀찮아져서 안 하고 싶어질 테지만, 아직까지는 좋다. 사실 산크리스토발도 세탁 맡기는 게 비싼 편이 아니다. 숙소에서도 1kg당 9페소로 3kg부터 맡길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아침도 빨랫비누를 잠옷에 비벼 빨아 널고, 저녁엔 맨투맨을 빨아 널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빨래를 널 때의 기분이나 내가 깨끗한 옷을 입고 싶어서 애쓰는 마음이 좋아서. 햇볕에 그 옷이 잘 마르는 것까지 된다면 감사한 일이다. 산크리스토발은 오후가 되면 흐려지니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El Abuelito Hostal 옥상엔 참새들이 자주 놀러 온다.

테라스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떤 남자가 빨래를 널러 왔다. 빨래집게가 없어서 방황하는 친구한테 내 빨래 두 개를 걷고 빨래집게 두 개를 줬다. 요르단에서 온 I라고 했다. 내가 빨래집게를 건네어 주니 미안해하며 고맙다고. 짧은 얘기들을 나누며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4시엔 노트북을 들고 나와 잠시 투닥이다 5시엔 밥을 하려고 했다. 작은 냄비를 오늘도 호주 할머니가 쓰고 있어서 잠시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오늘은 곧 치워주셔서 5시 20분쯤 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번 해 봤으니 이제는 더 잘할 수 있는 냄비밥. 센 불로 끓이다, 끓으면 휘휘 젓고, 뚜껑을 (난 뚜껑이 없어서 접시를) 덮고, 8분 약한 불로 끓이다 확인해 보면 거의 물이 없어지고 밥이 되어 있다. 5분 타이머를 맞추고 불을 끄고 뜸을 좀 들이면 냄비밥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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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되어가는 동안 감자를 썰어 전분을 빼고, 토마토를 썰어 오늘도 토달볶을 하고, 또 프라이팬을 씻어 감자를 넣고 볶다가 햄 조각을 넣고 카레가루를 넣었다. 오늘의 실수는 감자가 이렇게 달 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랄까. 감자가 너무 달아서 감자의 단맛 때문에 양념 맛이 안 났다. 그래도 이런 것도 여행을 할 때 재미있는 일이다. 비슷한 듯 다른 재료들로 나를 먹여 살리는 일, 심지어 이런 실수는 씁쓸한 맛이 없고 재미있다.


뒤에서 내일 아침에 먹을 샌드위치를 싸고 있던 일본인 부부가 (아침 6시 버스란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음식이 맛있게 되었으면 좀 나눠 주고 싶었는 감자의 단맛 때문에 맛이 오묘했다. 그래서 “냄새만 맛있는 거 같아..”하며 침울해하니 분명 맛있을 거라며 말해주는 부부. 숙소가 아닌 곳에서 두 번이나 마주쳐 참 반가웠던 부부인데 내일이면 떠난다니 내심 아쉽다.


어쨌든 그렇게 차려진 오늘의 밥상. 또 먹다 보니 먹을만해서 잘 먹었다. 오랜만에 ‘배가 부르다!’라는 기분으로 마친 식사. 역시 밥이 있고, 집어 먹을 게 두 개가 있으면 그런 식사를 할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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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마치고 배도 부른 김에 밤 산책을 나가봤다. 산크리스토발은 유일하게 밤에 돌아다녀도 안전한 멕시코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는데 여행자들의 도시라 시끌벅적할 것으로 예상한 것과는 달리 위험한 느낌은 안 들었지만 차분하고 소담한 느낌들의 야경만 있었다. 그조차 이 마을과 어울린다 싶긴 했지만.


문을 연 곳들은 펍과 레스토랑들 뿐이라 산책을 잠시하고 숙소로 돌아와 차를 한잔 끓여 마시며 산크리스토발의 4번째 밤을 마무리한다. 오늘도 대단한 일 없이 걷고, 나의 옷을 내 손으로 세탁하고, 나를 먹여 살리는 일 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어제보다 오늘 산크리스토발이 좋아졌다. 내일은 스페인어 학원 첫 수업이 기다리고 있어 꽤 긴장이 되면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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