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에서 만난 사람들, 마시멜로우 구워 먹
2025_6/16
오늘은 스페인어 학원 첫 수업 듣는 날. 여행 이후 처음으로 알람을 맞추고. 잠들었는데 긴장감 탓인지 6시에 눈을 떴다. 대충 준비를 하고 긴장 반 설렘 반으로 학원으로 길을 나섰다. 첫날의 짧은 기록이라도 할까 싶어서 고프로를 켜는데 안 켜진다.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고 믿고 싶어서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써보다 안되기에 일단은 가방에 넣어두고 학원으로 킵 고잉.
학원에 도착하니 나보다 한 10걸음 앞서가던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이 아르볼 학원으로 들어갔다. 학생인지, 선생님인지, 긴가민가하며 나도 따라 들어가니 부부 중 여자분이 나에게 와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걸어주었다. 그분이 나의 선생님 소피아였다!
역시나 경험이 주는 바이브인지 소피아는 아침부터 높은 텐션으로 수업을 열었다. 나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고 그냥 시장에서 무언가를 살 때, 누군가와 처음 만서 짧은 이야기를 하는 것, 길을 찾는 것 그 정도 수준의 회화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몇 년 전에 혼자 스페인어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던 적이 있는데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꼬모 에스따? - How are you? / muy bien - So good 이런 기본 안부 묻기로 시작을 했다. 기본인 데다 알파벳으로 쓰니 읽을 수는 있다 해도 내 것으로 체득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거 같다. 5일은 정말 짧지만 그래도 어찌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익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수업을 하면서 유용한 표현들도 배웠다. 예를 들면 Me llamo OO. 하고 늘 영어로 But you can call me~라고 했었는데 그걸 스페인어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이나, By the way 같은 표현, 나이를 얘기하고 가족 관계를 묻고 답하는 정도의 스몰토크 같은 걸 배웠다.
그리고 수업을 하다 말고 밖에서 들려오는 휘파람에 대해 아냐면서 얘기를 해줬는데 멕시코 전역에 저걸 부는 직업이 있단다. 근데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저 소리를 들으면 결혼을 할 수 없는 부정 탄다고 저 소리를 들은 미혼 여자는 옷을 터는 미신이 있다고. 자기는 절대 안 믿지만 할머니가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이런 일상에서 듣는 휘슬 소리에도 현지인들에겐 추억이 있고 옛이야기가 있고, 그런 걸 들으면 일상적이던 풍경도 좀 더 풍부하게 보이는 거 같다.
10시 20분까지 쭉 기본적인 인사말이나 소개하는 말들을 연습하고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학원 뒤쪽으로 가면 컵이 있어서 물을 떠마실 수도 있고, 리셉션에서 커피를 받아갈 수도 있다. 커피를 마시면서 멕시코는 요즘 K드라마 열풍이라 본인도 한글을 배우고 있다고 하는 소피아. 하지만 언어 체계가 달라 엄청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페인어는 한글보다 쉬우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을 해주었다.
나머지 30분은 문법 수업이었다. 영어에서 1인칭-2인칭-3인칭 이런 식으로 배우는 것처럼. Yo->me 이런 식으로 인칭대명사를 활용해서 문장을 만들어서 연습했다. 수업이 잘 진행되다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막혔다. 선생님의 예시가 끝나고 "Me gusta~"로 시작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뭘 좋아했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 거였다. 일단은 멕시코, 타코, 소파 아즈테카, 사르베사 등등 멕시코에서 경험한 것들을 얘기하 고나니 소피아가 "멕시코와 관련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뭐든 네가 좋아하는 걸 말해도 돼!"라고 말했다.
내가 뭘 좋아했더라? 그걸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 좀 답답했다. 인격을 상실한 듯 일에만 매진했던 지난 2년을 탓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어떤 세월이 날 휩쓸고 지나갔든 나는 남았다. 오로지 내 인생만 남긴 채로. 그러므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해야 내가 즐거울 것인지 고민하는 건 오로지 나만의 몫이 되었다.
여하튼 수업 중엔 문득 어제 일기를 쓴 게 생각이 나서 "나는 빨래하는 걸 좋아해"하니, 역시나 선생님은 그런 대답은 처음 들어봤다며 재밌어했다.
수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니 리셉션에서 오늘 침대를 옮겨도 된다고 했다. Abuelito가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시트를 갈아주는 거까진 아니어도 매일매일 침구 세팅을 새로 해준다는 건데 오늘은 침대를 옮기면서 시트까지 새 걸로 교체를 해주었다! 짐을 6번 침대로 옮겼다. 과거의 수잔이 세심하게 꾸민 곳이다.
그리곤 주방으로 와서 아침 겸 점심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토달볶, 배가 많이 고파서 계란을 세 개 넣고 햄 남은 것도 털어 넣었다. 토달볶은 정말 다행히 아직도 질리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도 다 하고서는 커피를 내리고 오늘 배운 것들을 복습했다. 내가 복습하는 동안 어제 옥상에서 마주친 I가 내 옆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I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는데 I는 특정한 인물에게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인류라는 존재 자체에 질려버린 마음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그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정들로 멕시코의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냐 물어서 이 도시에 온 지 8개월째, 아담은 그래도 여기에서 치유를 받고 있다고 했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인생 없다더니 어디나 그렇지만 사람들은 참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까먹고 살았던 건 그다지 대수로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일이야 지금부터 다시 찾아도 늦지 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인생은 계속해서 수렁과 수렁에서 빠져나오길 애쓰는 시간과 또 잠깐의 마른땅, 그런 것들이 반복될 테니까. 다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으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공부를 마저 하고 아침에 고장 난 고프로를 이래저래 켜보려고 하는데 죽어도 안 켜졌다. 전조증상 하나 없이 갑자기 이렇게 고장 날 수도 있는 일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계속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고프로를 되돌릴 방법을 검색하고 시도하고 검색하고 시도하다 결국 실패했다. 한숨 돌리러 옥상에 올라가니 미국인 할아버지가 계셨다.
스몰토크를 하다가 듣게 된 할아버지의 사연도 참 대단했는데, 이 분은 6년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 꽤 크게 사업을 했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큰 집, 좋은 차 여러 대, 여러 무리의 직원들, 그랬지만 자주 밤을 새워야 했고 그게 자신의 건강을 망친다고 느껴졌고 실제로도 망쳐서 그냥 모든 걸 정리했다고.
멕시코 몇 지역과 코스타리카 이런 곳에 별장 삼아 둔 곳들이 있어서 거기도 가고 거기 가는 길엔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땐 호스텔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땐 조용한 지역을 찾아 몇 달 정도 씩 여행을 하기도 한단다. 그에게 지금이 만약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였다면 지금 우리가 만나지도 못했을 텐데 인연이란 건 참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고, 나에게 젊음이란 건 행복을 선택할 무수한 기회라며 부럽다고 했다. 그 얘길 들으니 점심에 I와 나눴던 얘기랑 더불어서 나에게 고민이 안겨진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만나는 건 새로운 질문 거리를 받는 일이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는 일 같다.
생각을 좀 정리하고 나서보니 3시 반이 넘어가길래 일단 나갔다. 역시 하루를 일찍 시작하니 하루가 길다. 시장이나 어디에서 보급형 카메라라도 구할 수 없을까 싶기도 하고 요리 재료도 떨어져 가서 시장으로 향했다. 현지 시장으로 가 물어보니 산크리스토발 센트럴에는 카메라는 파는 상점이 없을 거란다. 여러 군데 물어봤지만 다 비슷하게 얘길 했다. 결국 딸기만 사고 돌아 나섰다. 딸기는 그다지 달지 않았는데 그래도 맛있었다.
걸어오는 길에 전자제품 판매점에 물어봤는데 거기도 없다고 하고, 결국 슈퍼에 들러 계란이랑 소시지랑 참치랑 맥주를 샀다. 사실 맨날 맥주 먹고 술 먹던 여행들에 비해 엄청 절주 중인데 오늘 I와 L(할아버지)과 나눈 얘기들도 그렇고 좋은 고민이지만 뭔가 우울하기도 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에 맥주를 사게 됐다.
6시엔 이르지만 저녁을 준비해서 밥을 먹고, 조금 저녁이 무르익었을 땐 맥주랑 딸기를 먹었다.
나름 심각하게 (딸기를 먹으며) 맥주를 들이켜고 있는데 수잔이 와서 "곧 벽난로에 불 붙일 거야~"하고 알려줬다. 아참 오늘 월요일이지!
호스텔의 요일별 행사 중 월요일은 벽난로에 마시멜로우 구워 먹는 날이다. 수잔 덕분에 이 호스텔의 행사들도 잘 굴러가는 거 같다. 대강 적던 것들을 정리하고 가니 벽난로에 불이 붙었다. 겨울 시즌에는 매일 피워 주려나? 그래도 불이 타오르는 걸 한 번은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곧 있으니 스태프가 마시멜로우를 잔뜩 가져왔고 우리는 구워 먹었다.
마시멜로우를 보니 여행을 떠나오기 직전에 단짝 친구와 인천에 가서 당일 캠핑을 했던 게 생각났다. 고작 마시멜로우 하나 구우면서 참 신났던 우리. 나의 소중한 친구는 마시멜로우를 굽는 일도 진지하게 즐거워하는 게 참 귀엽다. 그런 걸 떠올려보면 행복이라는 건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라 작은 그런 순간들을 만드는 거란걸 새삼스레 알게 된다. 마시멜로우 덕분의 오늘 고민의 결론이 잘 마무리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