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토르티아 만들기, 과달루페 성모 교회, 일상
2025_6/18
아침에 8시에 알람을 맞췄지만 본능적으로 수업이 12시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일어나기가 싫어서 9시 넘어서까지 잠을 잤다. 일어나니 거의 10시가 다 된 시간, 산크리스토발의 적정 기상시간은 10시인가 보다. 아침부터 추워서 몸을 덜덜 떨었다. 산크리스토발은 기온이 다른 곳에 비해서 낮고 일교차도 심하다. 오늘은 습도가 평소보다도 더 높아서 (낮에 워치를 보니 거의 80%에 육박하더라) 더 서늘하고 찝찝한 느낌이었다.
씻고 스킨을 바르는데 미까(숙소 스태프)가 와서 밖에 토르티아 만들러 나오라고 했다. 호스텔에서 월~금 각 요일마다 무언가 행사를 하는데 오늘은 토르티아 만드는 날, 토르티아 만들기는 오전에 하나보다. 스킨로션을 다 바르고 나가보니 사람들이 모여 마당에서 토르티아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토르티아를 아침으로 먹고 싶지는 않아서 구경만 하고 들어오려는데 미까가 5분만 해보라며 재촉해서 참여하게 됐다.
산크리스토발의 스태프들은 물론 같이 지내는 친구들도 모두 언제나 서로를 챙겨주려고 한다, 다만 언어적으로 나는 가끔 소통이 힘들 뿐.. 그래도 환영해 줘서 토르티아 하나를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처음은 위에 비닐을 까는 걸 까먹어서 대차게 실패했다. 당황하는 사이 늘 미소 지어주는 멕시칸 아저씨가 칼을 가져와서 수습을 해주었다. 두 번째는 다행히 성공, 바로바로 구워진 토르티아에 올려 먹을 수 있게 소스랑 재료들도 약간 준비되어 있었다. 나도 껴서 타코 한 조각을 먹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렴.. 타코는 식사가 될 수 없지.. 닛신에 참깨라면 맛이 난다는 라면을 사 와서 계란을 넣고 끓여 먹었다. 그저꼐 하고 남은 밥까지 말아먹고 나니 11시 20분이 넘었다. 학원에 가려면 빨리 준비를 해야 했다. 얼른 준비를 하고 학원으로 가니 다행히 52분이었다. 소피아는 어디 갔다고 5분 뒤에 올 거라고 환이 전해주었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 복습을 살짝 하고 있는데 벌써 소피아가 돌아왔다. 오전에 수업한 학생이 월마트에 무언가를 사야 하는데 스페인어가 필요해서 수업 대신 동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오늘의 수업도 어김없이 즐겁게 시작, 그런데 밥을 먹고 와서인지 아침에 수업하는 거보다 더 졸렸다.
오늘은 어제 공부하던 숫자를 복습하고 (여전히 너무나 어려운 숫자..) 돈에 관련된 어휘, 그리고 가족 파트로 넘어갔다. 재밌었던 건 아빠를 말하는 Padre와 Papa에서 파파에 강세를 빼버리면 감자가 되니 조심해서 말해야 한다는 거였다. 중국의 성조만큼은 아니지만 스페인어도 강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어서 발음을 더 디테일하게 해야 된다는 게 어려운 점 같다.
그리고 지옥의 SER/ESTAR 동사를 배웠는데.. 너무너무 어려웠다. 5년 전인가 스페인어 독학을 할 때 이쯤에서 포기했던 거 같은데 그래도 선생님이 있으니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원리를 이해하면.. 조금 더 쉬워지니까.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은 아마존을 들어가 봤다. 어제 구매한 오즈모 액션 4는 다행히 배송 출발을 했다. 벨리즈나 과테말라쯤 애매하게 고장 난 게 아니라(학원에서 소피아에게 물어봤는데 파나마 쪽은 카메라가 저렴? 하지만 멕시코는 카메라를 비싸게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도 해결할 수 있는 때에 고장이 난 건 오히려 다행이다
하여튼 그렇게 확인을 마치고 나니 3시 40분이라 과달루페 성당으로 산책을 나섰다. 원래는 워킹 투어를 가려고 했지만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거 보니 아마 안 가게 되지 않을까? 이번 여행에서는 그다지 친구를 사귀거나 투어를 한다거나 하는 것에 힘을 쏟지 않게 된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더더욱 좋아졌다.
과달루페 성당까지는 20분, 딱 산책하기 좋은 거리였다. 이어폰을 꽂고 신나게 걷다 보니 오늘은 멋진 그래비티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멕시코든 어디든 그래비티가 흔한 편인데 오늘따라 예쁘고 멕시코 스러운 (포쉬나 도둑?이나) 그림이나 엄청 퀄리티 좋은 어항 그림도 봐서 인상 깊었다. 특히 과달루페 성당 앞에는 홀리몰리한 그림과 무엇인가 반항스러워 보이는 그래비티가 한 앵글에 있다.
과달루페 성당은 계단이 많지 않아서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기대와는 달리 나무들이 우거진 탓에 산크리스토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려진 나무 사이로 비치는 마을들이 예뻤다.
성당은 아주 작았지만 아기자기하고 누구든 품어줄 것처럼 생겼다. 내가 갔을 때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두 사람, 진짜 현지인으로 보이는 기도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아주머니는 눈물을 계속 훔치며 기도하셨는데 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시길래 그러는지 정말 궁금했다.
나도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자리에 앉아 내가 신체가 건강해서 멕시코를 내 두 팔 두 다리로 여행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여유 없이 일했지만 그 덕에 여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얻은 것에 감사했다. 예전에 많이 하던 생각처럼 돈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정말 오랜만에 갑자기 들었다.
돈은 없어도 살 수 있다. 건강이 없으면 살기 힘들다. 마음이 지옥이면 살아가고 싶지 않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들. 무엇도 가진 게 없어도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절대로 죽어지지 않는 게 사람의 인생 아니던가. 아무리 죽으려고 애써도 미련이 남으면 죽어지지 않고, 아무리 잘 살고 싶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삶이란 건 그냥 흐르고 있고 그때 그때 내 마음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인 거 같다.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건 착각이다. 삶은 흐른다. 다만 그 삶의 내가 어떤 재료들을 섞어 어떤 빛깔을 낼지 정하는 거다.
이런 좋은 생각들을 오래간만에 했다.
돌아오는 길엔 갑자기 숙소 건너편 골목이 궁금해져서 넘어가 봤다. 늘 학원 쪽, 광장 쪽으로 돌다 보니 첫날 올 때 빼고는 한 번도 숙소 기준 왼쪽으로 돌아본 적이 없었다. 숙소 바로 다음 골목에도 식당들이 꽤 있었구나. 나는 이 마을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떠나게 되는 거 같다. 늘 어디론가 향할 때면 남겨지는 도시들에 대해 그런 생각을 든다.
숙소에 돌아와서 커피를 내려서 스페인어를 복습하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오며 가며 인사하고 지내는 흰 수염 아저씨가 "SER/ESTAR 하는구나" 하면서 "멕시칸으로서 미안~"하면서 응원해 주고 갔다. 1시간 정도 복습 완료. 잠깐 배운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이왕 배우기 시작한 거 한국에 가서도 더 심화로 배우도록 노력해 봐야겠단 다짐을 하게 된다.
공부를 끝내고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가니 어젠가 그저껜가 만났던 L 아저씨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앉아서 종알종알 잠깐 수다를 떨었다. 뭔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라 자연스레 그렇게 된 거였다.
그냥 불쑥 같이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 L은 지금이 좋다고 또 얘기했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가 부럽다고 해주었다. 인생의 기쁨이나 슬픔을 많이 경험해 봐서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부럽다고 하니 매우 감동적인 말이라며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한국도 언젠가 오고 싶다고 했는데 아저씨가 오면 정말 좋아할 거라고 얘기해 줬다. 요즘도 종종 온라인으로 일을 하는 아저씨에게 서울은 편리함을 줄 것이고 그곳에서 2-3시간이면 자연도 느낄 수 있다고 추천했다. 아저씨의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게 벌써 내 나이만큼의 옛날일이니 참으로 오래됐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건 그 어머니가 라면도 자주 해줬고 특별한 날엔 만두를 빚어주었고 김치도 종종 먹었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먼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누군가의 추억이 되어 지금 멕시코라는 먼 땅에서 나에게 들려온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김치로 만두를 만들 수 있는 거 아냐고 하니까 재밌어했다. 한국에 오면 꼭 먹어보라며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고 저녁을 먹을 때가 됐다. 밥 해둔 거랑 소시지 두 개랑 계란 두 개로 저녁을 준비했다. 오늘은 점심도 저녁도 커피도 간식도 집에서 다 해결한 하루. 그래도 빵+계란+햄만 먹는 게 아니라 다양하게 먹으니까 안 질리고 너무 좋다. 산크리스토발에 분명 맛있는 음식들이 많겠지만 장을 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자기 효능감을 높여주기도 하니 참 좋은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왠지 모를 헛헛함에 테킬라 생각이 나서 일기를 쓰며 테킬라도 한잔 했다. 일기를 쓰는 동안 흰 수염 아저씨가 오고 가며 한글 신기하다며 구경하고 가고, 오며 가며 사람들이 한 마디씩 얘길 나누고 간다. 일주일쯤 지내니 호스텔 사람들이 정말 식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많은 정이 들어버린 산크리스토발. 투어도 좋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하고 싶은 생각들을 하며 남은 일정도 좋은 마음들을 먹으며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