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산크리스토발 일상들, 포쉬데이, 칠라킬레, 비
2025_6/20
오늘은 마지막 스페인어 마지막 수업 날. 오늘은 더 찌뿌둥한 느낌에 겨우 일어나자마자 아마존 배송 위치를 확인했다. 새벽 2시에 치아파스 바로 위에 있는 타바스코 주까지 오기는 했는데, 오늘 안으로 택배가 올까? 오지 않으면 하루 더 있어도 좋았다.
막상 산크리스토발을 떠나려니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 인건 ADO의 예약 할인 프로모션도 끝나서 (원래는 토요일 버스 하나만 프로모션 중이라 300페소 정도 차이가 났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버스 가격이 똑같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하루 더 있어도 좋겠지. 확인을 하다 보니 40분이 다돼가서 얼른 양치를 하고 길을 나섰다. 날씨도 맑은데 왜 이렇게 몸이 찌뿌둥할까?
마지막 수업에서는 길을 묻는 표현, 내가 현지인들에게 뭔가를 얘기하고 답을 들었을 때 알아들을 어휘들, 생존용 스페인어들을 배웠다.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했을 때 겨우 5일 동안 스페인어를 배우는 게 도움이 될까 싶어 이것저것 검색해 봤을 때 대부분 1-2주 하는 건 도움 안된다, 공부를 해와라 이런 식의 글들을 많이 봤다. 그래도 안 하는 거보다는 하는 게 낫겠지란 생각으로 등록했는데 너무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사말 말고는 아는 것도 없고 숫자도 10이 넘어가면 매번 헷갈렸고 인사말 외에 다른 어휘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으니 10시간이란 수업만으로도 많은 걸 얻은 기분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또 한국에 돌아가서도 스페인어 공부를 더 하고 싶어졌다. 10시간이라 할인이 안 들어가서 시간당 200페소, 총 2000페소 수업을 들었는데 그 가치를 충분히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1:1 수업인데!
소피아는 너무 좋은 선생님이었고 여행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학원 쪽으로, 혹은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사진도 찍었는데 양치만 하고 와서 엄청 거지꼴이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소피아가 생각날 때 볼 사진이 생긴 것만으로 좋았다. 소피아는 지금까지 수업을 잘 해왔으니 여행을 잘 해낼 거라고 응원한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멕시코는 정말 큰 나라니까 또 다음에 여행을 다시와도 볼 것이 많을 거라고 그때 다시 산크리스토발에 들릴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조지아에서 만났던 잉잉이나 알렉스처럼 그가 한국으로 오거나 내가 말레이시아로 가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시 만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 소피아를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미지수지만 어떤 인연들이 생긴다는 건 이별에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점이 더 많은 일이다.
산크리스토발 숙소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가령 수잔이나 L 할아버지처럼 나이 든 노인들이 여전히 여행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모습에서 나의 그런 미래를 꿈꿔본다거나 I처럼 상처받았지만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보며 사람의 삶엔 언제나 기쁨도 오지만 슬픔도 온다는 것을 느낀다거나, 또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들을 배우게 된다. 대단치 않은 얘기들을 하더라도 나랑 같은 방 숙소를 쓰는 친구처럼 멕시칸 현지인의 일상의 이야기를 알게 되기도 하고, 여러모로 어떤 사람을 알게 된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를 엿보는 일이기 때문에 그 세계의 틈을 열어주는 이에게 감사한 일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점심을 어떡하지 고민하다 어제 El tostada cafe가 정말 괜찮았기에 소피아의 추천들에 신뢰가 100% 생겼다. 그래서 오랜만에 멕시코 음식에 도전해 보기로. 소피아랑 오늘 어휘 공부를 하면서 아침 식사할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망설임 없이 추천해 준 <LAS LOLAS>에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고작 3분밖에 안 걸린다.
지난번에 산책하면서 봤을 때도 손님이 많았는데 12시에 가니 테이블 2개 뺴고는 만석이었다. 그마저도 막 나간 듯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2인석에 앉자마자 4인석도 5명이 온 손님들이 앉아 식당이 꽉 찼다.(대기 명단표도 있다.) 현지인들의 맛집이라더니 사실인가 보다.
맛있어 보이는 토스트가 있었지만 아는 맛은 미루고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멕시코 전통 아침식사라고 하는 <칠라킬레>가 그것이다. 칠라킬레는 토리토스 같이 생긴 토티아를 세모나게 잘라 튀긴 애들을 말하는 건데, 메뉴 <칠라킬레>는 이 칠라킬레를 마구 깔고 그 위에 레드 소스나 그린 소스를 뿌리고 닭고기나 계란, 치즈를 올려서 먹는 메뉴다. 멕시코인들에게는 흔히 ‘냉털’ 메뉴로 냉장고에 애매하게 남은 재료들을 때려 넣고 집에서 먹기도 하는 흔한 아침식사라고 한다.
라스 로라는 스페셜 칠라킬레와 일반 칠라킬레가 있는데 후기 사진 상으로는 일반 칠라킬레도 충분히 양이 많아 보여서 칠라킬레 오리지널을 시켰다. 시키고 나면 "커피 마실래?" 물어본다. 유럽처럼 돈을 받는 게 아니라 현지인 식당들의 많은 곳들이 DESAYOUNO 시간에는 커피를 공짜로 제공한다. 게다가 멕시코는 아침을 늦게 먹어서 오후 1시까지 Desayouno를 먹을 수 있다.
커피를 주는 것까지는 소피아가 아침을 주문하면 커피를 주는 곳이 많다고 해서 예상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건 식전 빵과 과일 주스도 제공한다는 것이다. 빵은 그냥 대충 담은 게 아니라 정성껏 토스트해 달달한 잼과 나온다. 주스는 오렌지와 당근을 섞은 느낌이었는데 맛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메뉴 하나를 시키면 1인분 몫의 식전 빵, 커피, 주스를 다 제공하는 것, 정말 놀랍다.
식전빵을 다 먹고 조금 기다리니까 칠라킬레가 나왔다. 옆자리 현지인들이 먹던 스페셜 칠라킬레 그릇보다는 작았지만 이 역시 어마어마했다. 멕시코 음식이 그다지 잘 맞지 않았던 나인데 산크리스토발에서 계속 한식을 해 먹으니 멕시코 음식을 먹을 입맛이 좀 돌아왔는지 군침이 돌았다.
직원의 추천을 받아 레드 소스를 선택한 거였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마도 토마토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좋아할 토마토소스+조금 더 풍부한 맛이다. 중간중간 닭고기도 크게 크게 많이 들어있고, 치즈가 일품이었다. 칠라킬레도 소스에 젖어드니 먹기 좋게 부드러워졌고 소스에 아직 덜 적셔진 부분은 또 바삭바삭했다. 매일매일 매 끼니를 이렇게 먹으면 역시 힘들겠지만 몇 날며칠 밥 해 먹으며 다시 멕시코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고 나니 맛있게 잘 먹을 수 있었다.
양이 많아 결국 반절 좀 안되게 남겼다. 소피아가 말한 것처럼 멕시칸들은 점심이나 특히 아침을 거하게 많이 먹는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양도 많고 맛도 있고, 무엇보다 식전 빵이나 커피, 주스까지 너무 만족스러워서 팁까지 계산을 하고 나왔다. 누군가 산크리스토발에 온다면 꼭 칠라킬레가 아니어도 좋으니 한 번쯤 현지식 아침을 맛보길 추천해 줄 것이다.
밥을 먹고 숙소에 돌아와서 옥상에 좀 앉아있으려고 올라갔더니 L 할아버지가 있었다. 타로 카드를 가지고 있길래 타로를 볼 줄 아냐고 하니 배우는 중이라고 한다. 궁금한 게 있냐고 해서 고민을 해봤다.
“제 여행이 행복하게 끝이 날까요?” ->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도 행복한걸, 그런 건 내가 마음먹는 것에 달렸다.
“제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요?” -> 글쎼 그런 건 타로에 묻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이것도 크게 걱정 안 된다. 난 왠지 잘 될 거 같아서(?)
고민을 하다 “올해 안에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봤다.
내가 뽑은 카드는 <대제사장> 대답은 “MAYBE” 해석을 해보자면 머리가 시키는 일이 아닌 심장을 쫓는 게 우선이고, 자신만을 위한 선택보다는 타인을 위한 일들을 하는 게 자신을 위해 이롭다는 그런 얘기였다. 뻔하지만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노인에게 다시 들으면 좋은 이야기 아닌가.
L은 무언가를 고민할 때 스스로를 위해 카드를 많이 뽑는다고 한다. 그건 대답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고 결정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것에도 도움을 준다고. 타로에서 무언가 답을 얻는다기 보다 가령 무작위로 나오는 좋은 명언을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위로를 받고, 고민을 해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에 정답이 없고, 내 삶을 신경 쓰고 이끌어 가려 애쓰는 건 오로지 나뿐이고, 결국 나는 나를 일평생 키워야 한다. 내가 나를 키우는 일에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고 기댈 수 없지만 스스로를 더 잘 아는 것 만으로 많은 것들이 나아진다는 L 할아버지의 말은 참 인상적이었다. 나를 잘 알고 나를 돕도록 내가 노력하는 게 잘 사는 법이구나.
해가 쩅 하니 카페라도 갈까 하며 일단 1층에 내려와서 좀 앉아있었는데 10분 전까지만 해도 쨍쨍했던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온몸이 찌뿌둥하고 무릎도 쑤시더라니 생각했다. 비 덕에 잠깐의 휴식을 조급해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잠깐 누워 유튜브를 봤다(?) 생각보다 여행을 하면서 유튜브를 보고 시간을 보낼 일이 없다. 장시간 버스 이동을 할 땐 데이터가 안 되는 곳도 많고 무엇보다 난 데이터가 한 달에 5기가뿐이라 아껴야 해서 음악을 듣고 글을 쓰거나 자는 편이다.
그렇게 4시 반까지 실컷 여유를 부리다 리셉션에 미까를 찾아갔다. 혹시 배송 관련 연락을 받은 게 있느냐 물어보니 없다며 "여기는 멕시코잖아~" 이랬다. 어쨌든 토요일 도착 보장 상품이니 맘 편히 토요일에 온다고 생각하고 하루를 연장해야겠다. 미까에게도 하루를 연장하는 예약을 한다고 얘기를 했더니 좋아했다.
노트북이랑 등등 챙겨 들고 오랜만에 백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갔던 El tostada에서 커피를 한잔 하러. 커피는 호스텔에서도 마실 수 있고 호스텔엔 심지어 와이파이도 있지만 (이 카페는 정말 모든 것이 완벽-싸고 맛있고 예쁘고 편안하고 직원이 친절하다-하지만 단 하나 단점은 와이파이가 없다) 그래도 오늘 하고 내일이면 끝인데 산크리스토발을 더 느끼고 싶었다.
카페에 앉아 숙박을 하루 연장하고, ADO를 예약했다. 비가 오니 어제랑은 또 다른 풍경이라 카페 밖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시간이 잘 갔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7시가 다 되어가기에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오는 길엔 Super mars에서 맥주도 샀다. (여긴 100페소 이상만 카드 결제가 된다.)
돌아오니 오늘은 다시 돌아온 금요일, 포쉬 데이였다! 역시나 수잔과 미까가 반겨주는 포쉬데이, 오는 길에 비가 와서 젖은 가방을 대강 정리해 두고 참여했다. 오늘은 스페인에서 온 아저씨, I, 스페인과 프렌치에서 각각 온 여자친구들과 함께였다.
오늘은 또 다른 포쉬가 준비되어있었는데 그전에 비해 더 부드러웠고, 오늘의 수잔 컬렉션은 자두와 피나(파인애플)이었다. 둘 다 맛있었지만 역시 지난주에 먹었던 매운맛의 그 메즈칼이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던 찰나 수잔이 그것 또한 내어주어 한잔을 했다. I는 나랑 자주 스몰 토크를 했는데 내가 술 먹는 건 처음 봐서 "한국인들은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하면서 엄청 놀라워했다. 수잔이 "넌 아직 한국인을 모르는 거야."이랬다.
조금씩 마시다 보니 6-7잔은 마시게 됐는데, 조금 알딸딸 기운이 올라왔다. 수잔은 어느새 사라지고(우리 아빠의 말로는 술을 먹고 나서 스스로 빠지는 때를 알고 조용히 사라지는 능력이 어른의 덕목이랬다. 수잔은 항상 존재감 100프로로 즐기다가 어느새 보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나빼고는 스페인어가 더 익숙한 친구들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프렌치 언니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면서 물어봐주고 설명도 해주었지만 나도 어른의 덕목을 발휘해 빠질 때가 된 것 같아 슬쩍 빠져나왔다.
다른 공간으로 가서 일기를 쓰며 혼자 맥주를 좀 마시며 밖을 보니 비가 더 세차게 내린다. 내가 온 첫날만큼 내리는 거 같았다. 맥주를 마시다 비 구경을 하고 또 마시고 비구경을 하고 있자니 비는 그칠 새를 모르고 더 내려 작은 냇물까지 만들어 냈다. 첫날엔 산크리스토발의 폭우를 보면서 여기에 머물러도 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는데 이제는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이마저도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하게 된다.